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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1.서론
2.1 알제리의 국가개괄
2.2 알제리의 정치역사
2.2.1 왕조시대 및 오스만 터키 당시의 사회모습
2.2.1.1 알제리 시절의 왕조시대(오스만 터키 이전)
2.2.1.2 오스만 터키의 통치
2.2.2 프랑스 식민지 당시의 독립운동 및 사회모습
2.2.3 독립 이후 상황 및 사회모습
2.2.3.1 벤 벨라
2.1.3.2 부메디엔
2.2.3.3 샤들리 벤자디드
2.2.3.4 국가최고회의와 라민 제루알
2.2.3.5 압델 아지즈 부테플리카
2.2.4 기타(알제리 약사)
2.3 튀니지의 국가개괄
2.4 튀니지의 정치역사
2.4.1 튀니지 국가의 형성 및 식민지시대
2.4.2 튀니지의 독립
2.4.3 독립 이후 정권과 사회모습
2.4.3.1 부르기바 정권의 세속주의,서구지향적 국가발전
2.4.3.2 벤 알리의 집권과 80년대의 정치개혁 과정
2.4.3.3 튀니지 이슬람운동과 정치발전
2.4.3.4 아랍 민주화 운동과 새로운 권력의 출현
2.5 예멘의 국가개괄
2.6 예멘의 정치역사
2.6.1 지배와 분단 이전의 예멘
2.6.2 오스만 통치기와 분단, 그리고 통일
2.6.3 평화통일 실패의 원인과, 남․북예멘의 비교
2.6.4 통일예멘에서 민주화시위, 그리고 어제까지
3. 결론
참고문헌
1.서론
2.1 알제리의 국가개괄
2.2 알제리의 정치역사
2.2.1 왕조시대 및 오스만 터키 당시의 사회모습
2.2.1.1 알제리 시절의 왕조시대(오스만 터키 이전)
2.2.1.2 오스만 터키의 통치
2.2.2 프랑스 식민지 당시의 독립운동 및 사회모습
2.2.3 독립 이후 상황 및 사회모습
2.2.3.1 벤 벨라
2.1.3.2 부메디엔
2.2.3.3 샤들리 벤자디드
2.2.3.4 국가최고회의와 라민 제루알
2.2.3.5 압델 아지즈 부테플리카
2.2.4 기타(알제리 약사)
2.3 튀니지의 국가개괄
2.4 튀니지의 정치역사
2.4.1 튀니지 국가의 형성 및 식민지시대
2.4.2 튀니지의 독립
2.4.3 독립 이후 정권과 사회모습
2.4.3.1 부르기바 정권의 세속주의,서구지향적 국가발전
2.4.3.2 벤 알리의 집권과 80년대의 정치개혁 과정
2.4.3.3 튀니지 이슬람운동과 정치발전
2.4.3.4 아랍 민주화 운동과 새로운 권력의 출현
2.5 예멘의 국가개괄
2.6 예멘의 정치역사
2.6.1 지배와 분단 이전의 예멘
2.6.2 오스만 통치기와 분단, 그리고 통일
2.6.3 평화통일 실패의 원인과, 남․북예멘의 비교
2.6.4 통일예멘에서 민주화시위, 그리고 어제까지
3.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고 무역업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통치자들은 카르타고의 토착민을 피했다. 그들 토착민은 리비아인, 누미디아인, 그리고 마우리인들이었는데, 나중에 이들은 베르베르인으로 불렸다. 베르베르인들은 카르타고인들로부터 선진 농업기술을 배웠으나, 그 후 많은 이들이 사막과 산간지역으로 들어가버렸다.
카르타고와 로마가 기원전 2세기에 지중해 서부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서로 격렬하게 싸우게 된 것은 시칠리아 지배권을 두고 서로 충돌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기원전 260년쯤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를 통일시키고 시칠리아를 향하면서 카르타고에 도전장을 던졌으며, 기워전 200년쯤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베르베르인의 도움을 받아 카르타고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카르타고가 패하자 로마인들이 아프리카 정착을 시도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카르타고 시가 함락된 지 30년 후에 로마인들은 동쪽 트리폴리타니아로 진격했다. 기워전 64년쯤 리비아 북부 전체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왔고 남부의 가라만테스와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다른 부족들만이 이들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로마가 멸망하는 4세기까지 북아프리카는 로마제국의 요지로서 자리매김을 했는데, 특히 농업이 매우 중요시되었다. 1세기까지 아프리카는 로마제국의 곡물 필요량의 60퍼센트 이상을 공급했으며, 로마는 축산과 어업에서, 특히 원형 경기장에서 사용되는 가축의 대부분을 아프리카에서 수입했다.
로마 통치 시기에 도시화가 눈에 띄게 진전되자 튀니지, 알제리북부, 모로코의 일부에서도 도시화가 가속화되었다. 로마의 제대 군인들이 불하받은 해안 식민지 지역과 그 곳 민간인들이 도시화와 로마풍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많은 토착 공동체가 번성했고 그 곳의 일부 시민은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마그립에서는 로마의 정복과 함께 로마의 행정체계가 도입되어 시골이 새롭게 발전했다. 로마의 통치는 비교적 물이 잘 급수되는 해안 평지와 알제리의 후배지, 그리고 튀니지 북부의 푼 지역의 상류층을 로마화시켰다. 로마 점령 1세기 동안에 아프리카의 고원지대는 드문드문 로마인들의 계절적인 목출지로 쓰였으며, 100년경에는 로마인들이 고원지대에 보리를 재배하거나 올리브 나무를 들여다 심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이주했던 반달족은 429년에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마그립으로 이동했다. 한때 아프리카에 거주한 그들의 총 숫자는 과소평가된 감은 있지만 많아야 8만명을 넘지 못해 당시 카르타고의 로마 인구보다 적었다. 반달족은 4세기 중반 지중해 서부를 장악했고 로마는 이제 이빨 빠진 사자에 불과했다.
반달인들은 한때 카르타고 사람들과 누미디아 사람들이 살았던 동부 해안 평지와 도시의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마그립의 나머지는 사실상의 통제권을 갖고 있던 베르베르 통치자들에게 넘어갔다.
반달족은 로마보다는 카르타고 방식에 따라 통치하려 했다. 반달족의 힘이 해군력에 있었던 만큼 그들은 약 440년에서 480년까지 지중해 서안 지역을 지배했다. 그들은 북아프리카 내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는데, 북아프리카 항구들에 대한 이러한 통제 방식은 북아프리카 역사를 통해 되풀이되었다. 해안선을 따라 지배하다 보니 다른 정복자들도 항구와 소수의 고립된 내지만을 공략하고 아프리카 내륙 안쪽에 사는 정착민의 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후 1세기 반 동안, 즉 700년 직후에 무슬림에 정복당하기 전까지 마그립의 반달족 통치 지역은 비잔틴 군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리고 로마인 통치 시대로 다시 돌아왔지만 첫 번째 로마인의 통치 때와는 달랐다. 약 400년 이후부터 마그립의 극서 전 지역은 따로 독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2) 아랍인 정복자들
-우마위야, 압바시야 왕조
6세기에 비잔틴 문화가 로마 세계를 재통합하려다 실패로 끝난 후 기독교 세계는 분열되었으며, 7세기 중반에는 이슬람이 아라비아에 등장하였다. 아라비아는 로마의 국경 너머에 있었지만 경제와 문화면에서 로마 세계와 여러 경로로 관련되어 있었다.
이슬람의 교조 무함마드는 610년 새로운 신이 아닌, 다시 말해서 유대교와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신저를 자처하면서 메카에서 등장했다. 결국 새로운 종교로 귀결되었지만 그는 이슬람이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만 유대 전통에서 믿어 왔던 선지자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예수가 전한 부분적인 신의 계시를 완성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이들 선지자들의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예언자들의 봉인\'이라고 주장했다.
무함마드는 초기에 많은 반대에 부딪쳤는데, 메카의 유지들의 반대가 너무 심해 622년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메디나로 이주했다. 메디나에서는 무함마드가 단순히 전도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서 신자 공동체의 영적, 그리고 세속적인 지도자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메디나에서는 국가 창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유목생활을 그만두고 오아시스에서 정착생활을 하게 된 아랍인들이었다. 무함마드의 군대는 이웃의 적들과의 싸움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런 승리는 추종자들의 수효를 불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630년에는 메카도 이슬람과 무함마드의 통치를 수용해야 했고 632년 무함마드가 죽을 때쯤에는 나머지 아라비아 지역이 그의 휘하에 들어왔다. 636년에 무슬림들은 시리아를 점령했으며, 651년까지는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포함해 이집트에서 페르시아까지 전 중동에 이르는 정복을 끝마쳤다. 660년대에는 우마위야 왕조의 새로운 아랍 통치자들이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겼다. 우마위야 왕조는 750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가 이슬람 전 역사를 통해 유일하게 모든 무슬림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시킨 때였다.
그러나 이웃 국가들을 정복한 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랍인 정복자와 피정복지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새로운 무슬림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우마위야 왕조는 강압적인 개종과 타 종교에 대한 박해를 피했다. 그 대신 유대교인과 기독교인, 심지어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인들까지도 \'성서의 백성\'으로 간주하고 이들 종교 중 일부는 참되다고 인정했다. 다만, 이들은 무슬림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했기
카르타고와 로마가 기원전 2세기에 지중해 서부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서로 격렬하게 싸우게 된 것은 시칠리아 지배권을 두고 서로 충돌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기원전 260년쯤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를 통일시키고 시칠리아를 향하면서 카르타고에 도전장을 던졌으며, 기워전 200년쯤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베르베르인의 도움을 받아 카르타고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카르타고가 패하자 로마인들이 아프리카 정착을 시도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카르타고 시가 함락된 지 30년 후에 로마인들은 동쪽 트리폴리타니아로 진격했다. 기워전 64년쯤 리비아 북부 전체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왔고 남부의 가라만테스와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다른 부족들만이 이들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로마가 멸망하는 4세기까지 북아프리카는 로마제국의 요지로서 자리매김을 했는데, 특히 농업이 매우 중요시되었다. 1세기까지 아프리카는 로마제국의 곡물 필요량의 60퍼센트 이상을 공급했으며, 로마는 축산과 어업에서, 특히 원형 경기장에서 사용되는 가축의 대부분을 아프리카에서 수입했다.
로마 통치 시기에 도시화가 눈에 띄게 진전되자 튀니지, 알제리북부, 모로코의 일부에서도 도시화가 가속화되었다. 로마의 제대 군인들이 불하받은 해안 식민지 지역과 그 곳 민간인들이 도시화와 로마풍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많은 토착 공동체가 번성했고 그 곳의 일부 시민은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마그립에서는 로마의 정복과 함께 로마의 행정체계가 도입되어 시골이 새롭게 발전했다. 로마의 통치는 비교적 물이 잘 급수되는 해안 평지와 알제리의 후배지, 그리고 튀니지 북부의 푼 지역의 상류층을 로마화시켰다. 로마 점령 1세기 동안에 아프리카의 고원지대는 드문드문 로마인들의 계절적인 목출지로 쓰였으며, 100년경에는 로마인들이 고원지대에 보리를 재배하거나 올리브 나무를 들여다 심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이주했던 반달족은 429년에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마그립으로 이동했다. 한때 아프리카에 거주한 그들의 총 숫자는 과소평가된 감은 있지만 많아야 8만명을 넘지 못해 당시 카르타고의 로마 인구보다 적었다. 반달족은 4세기 중반 지중해 서부를 장악했고 로마는 이제 이빨 빠진 사자에 불과했다.
반달인들은 한때 카르타고 사람들과 누미디아 사람들이 살았던 동부 해안 평지와 도시의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마그립의 나머지는 사실상의 통제권을 갖고 있던 베르베르 통치자들에게 넘어갔다.
반달족은 로마보다는 카르타고 방식에 따라 통치하려 했다. 반달족의 힘이 해군력에 있었던 만큼 그들은 약 440년에서 480년까지 지중해 서안 지역을 지배했다. 그들은 북아프리카 내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는데, 북아프리카 항구들에 대한 이러한 통제 방식은 북아프리카 역사를 통해 되풀이되었다. 해안선을 따라 지배하다 보니 다른 정복자들도 항구와 소수의 고립된 내지만을 공략하고 아프리카 내륙 안쪽에 사는 정착민의 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후 1세기 반 동안, 즉 700년 직후에 무슬림에 정복당하기 전까지 마그립의 반달족 통치 지역은 비잔틴 군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리고 로마인 통치 시대로 다시 돌아왔지만 첫 번째 로마인의 통치 때와는 달랐다. 약 400년 이후부터 마그립의 극서 전 지역은 따로 독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2) 아랍인 정복자들
-우마위야, 압바시야 왕조
6세기에 비잔틴 문화가 로마 세계를 재통합하려다 실패로 끝난 후 기독교 세계는 분열되었으며, 7세기 중반에는 이슬람이 아라비아에 등장하였다. 아라비아는 로마의 국경 너머에 있었지만 경제와 문화면에서 로마 세계와 여러 경로로 관련되어 있었다.
이슬람의 교조 무함마드는 610년 새로운 신이 아닌, 다시 말해서 유대교와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신저를 자처하면서 메카에서 등장했다. 결국 새로운 종교로 귀결되었지만 그는 이슬람이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만 유대 전통에서 믿어 왔던 선지자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예수가 전한 부분적인 신의 계시를 완성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이들 선지자들의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예언자들의 봉인\'이라고 주장했다.
무함마드는 초기에 많은 반대에 부딪쳤는데, 메카의 유지들의 반대가 너무 심해 622년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메디나로 이주했다. 메디나에서는 무함마드가 단순히 전도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서 신자 공동체의 영적, 그리고 세속적인 지도자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메디나에서는 국가 창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유목생활을 그만두고 오아시스에서 정착생활을 하게 된 아랍인들이었다. 무함마드의 군대는 이웃의 적들과의 싸움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런 승리는 추종자들의 수효를 불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630년에는 메카도 이슬람과 무함마드의 통치를 수용해야 했고 632년 무함마드가 죽을 때쯤에는 나머지 아라비아 지역이 그의 휘하에 들어왔다. 636년에 무슬림들은 시리아를 점령했으며, 651년까지는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포함해 이집트에서 페르시아까지 전 중동에 이르는 정복을 끝마쳤다. 660년대에는 우마위야 왕조의 새로운 아랍 통치자들이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겼다. 우마위야 왕조는 750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가 이슬람 전 역사를 통해 유일하게 모든 무슬림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시킨 때였다.
그러나 이웃 국가들을 정복한 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랍인 정복자와 피정복지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새로운 무슬림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우마위야 왕조는 강압적인 개종과 타 종교에 대한 박해를 피했다. 그 대신 유대교인과 기독교인, 심지어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인들까지도 \'성서의 백성\'으로 간주하고 이들 종교 중 일부는 참되다고 인정했다. 다만, 이들은 무슬림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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