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지역 유적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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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통영지역 유적답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녹우당(綠雨堂) 2
윤두서와 그의 화풍, 초록비가 내리는 녹우당,
중세장원으로서의 녹우당, 실용정신을 구현한 녹우당
Ⅱ. 두륜산 대둔사大芚寺(대흥사) 16
연혁· 진입로와 북원· 남원· 별원· 북미륵암· 초의선사
Ⅲ. 미황사(美黃寺) 38
개관 · 대웅보전 · 응진각 · 괘불탱 · 승탑군
Ⅳ. 땅끝마을[토말]과 명랑대첩 48
Ⅴ. 부용동 정원 55
개관 · 정원구조 · 세연정정원의 상징성

본문내용

암을 닯았다고 했는데, 와룡이란 평소 와룡관을 쓰고 있어 와룡선생이라 불렸던 촉한의 제갈량에 얽힌 고사와 관련되어 있다. 제갈량은 희대의 걸출한 인물이었지만 삼고초려에 응하기 전에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러니 이 바위에는 대망을 꿈꾸었던 윤선도의 야심이 투영되어있다고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고산은 이상적인 공간을 찾기 위한 노력과 발견된 공간을 이상적으로 배치하기 위한 노력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즉, 이 모든 공간이 그의 엄정한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자연이기에 고산 자신과 밀착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조작에 의해서만이 그 기능을 다할 수 있는 자연 위에서 자연과의 친밀감을 읊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결국 고산은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자연을 어부사시사에서 추구하면서 세연정정원에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공간을 상징적으로 조성하였음을 볼 수 있다.
부용동정원 전체를 놓고 볼 때 주목해야 할 것은 건물은 물론이거니와 바위, 계곡 등 자연물까지도 인문적 경관으로 탈바꿈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특별히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이루어졌는데, 각 대상물에는 고산이 추구했던 성리학의 세계, 유교적 인생관, 출처지의, 그리고 풍류사상이 투영되어 있다. 예컨대 섬의 주봉을 격물치지와 주자의 호인 자양과 결합하여 격자봉이라 하였고, 낙서재 뒤쪽의 바위를 소은병이라 한 것은 그의 성리학적 성향과 주자를 흠모하는 심정의 발로이다. 윤선도는 주거처인 낙서재를 지을 때 집 뒤쪽의 바위를 소은병이라 명명했는데, 그것은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구곡(武夷九曲)의 대은병(大隱屛)에 비유한 것이다. 주자는 그의 시 「무이구곡」에서 ‘일곱 굽이에 가서 배를 옮겨 푸른 여울 올라가니 은병선장을 다시 돌아보더라’라고 했다. 「고산유고」에서도 소은병이 송나라 주자가 경영하던 무이산의 대은병보다 작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했다. 이를 통해서 윤선도가 부용동에 처음 터를 열고 정원을 꾸밀 때부터 평소에 상상했던 무이구곡의 정경을 정원에 도입하려고 했으며 그를 통해서 주자를 따라 배우는 자세를 가다듬으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낙서재 부근을 흐르는 낭음계는 \'명랑하게 소리 높여 시가를 읊는 계곡\' 이라는 뜻으로서, 음풍영월(吟風詠月)하던 은일자의 풍류 세계가 그 이름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는 수몰되어 확실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낭음계 주변에 있었던 곡수당의 이름은 진나라 왕희지가 난정에서 문인들과 함께 술잔을 물 위에 띄워놓고 시를 짓고 즐긴, 이른바 유상곡수연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윤선도가 이 곡수당 곁에서 유상곡수연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곡수당 난간에 걸어놓았다는 취적헌 편액의 \'취적(取適)\'은 \'취적비취어(取適非取魚)\'에서 유래된 말인데 \" 낚시질을 하는 참뜻은 물고기 잡는데 있지 않고 쾌적을 취하는데 있다.\" 는 뜻으로 어떤 행동의 목적이 현실과 다른 곳에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은 강태공의 \'위수조어(渭水釣魚)\' 고사의 내용과 상통한다.
한편 익청헌(益淸軒)의 \'익청\'은 주돈이가 지은 「애련설」의 \'향원익청(香遠益淸)\'에서 따온 말이며, 무민당의 \'무민(無憫)\'은 \"외물에 집착하지 아니하여 근심 걱정이 없는 경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아래에 있었다는 유의교(有意橋)의 \'유의\'는 양 언덕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가 있어‘그 꽃이 떨어지는 데 어떤 뜻이 있는 것 같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건너편 산허리에 있는 \'동천석실\'이라 이름 한 작은 집이 있는데, 그 이름은 천하의 명산 경승으로 신선이 살고 있는 곳을 \'동천복지(洞天福地)\'라고 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북쪽을 바라볼 수 있는 봉우리는 임금을 연모하는 마음을 담아 혁희대라 한 것, 세연지의 바위를 와룡암으로 비유한 것, 곡수당 편액을 취적헌이라 한 것 등은 선비의 출처지와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동천석실, 옥소대 등은 신선사상과 관련이 있고, 곡수당과 낭음계는 풍류사상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부용동 정원의 동대와 서대, 그리고 무도암은 다른 별서정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요소이다. 이 요소들은 시· 가· 무 합일이라는 동양 고래의 유교적 예술철학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정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Ⅵ. 장보고 유적지
출생과 당에서의 활동
출생내력
- 삼국사기 : 불명
- 덕수 장씨 대동보 : 애장왕 2년(801) 완도읍 장좌리에서 장백익의 아들로 탄생
* 平人 이하의 하층 계급으로 추정
당에서의 활동
- 젊은 나이에 당으로 가 서주의 무령군에 복무
* 30세에 1천명을 지휘하는 군중소장(軍中小將)으로 승진
1. 장보고의 일생
해상왕국의 몰락과 유산
몰락의 배경
- 청해진의 사무역 독점에 따른 군소 해상 세력가의 불만 점증
- 경제력과 군사력 증강에 중앙정계의 경계감 확산
해상왕국의 몰락
- 군소 해상 세력가와 중앙정계의 합작에 의해 제거
장보고의 유산
- 해상 세력가들의 독자적 활동으로 상업자본 축적
- 해상 세력가 왕건 등장
해상왕국 건설
귀국동기
- 신라인의 노예매매 방지
- 신라 당 일본의 3국 무역장악 계획
- 당나라의 감군 정책
청해진 설치
- 흥덕왕의 승인아래 1만명의 군졸로 청해진 설치
* 청해진은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다소 벗어난 것으로 추정
해상왕국의 번영
- 동아시아 삼국의 통제가 이완된 상태에서 무역 독점
* 노예무역 근절을 핑계로 타 무역인 단속과 在唐 신라인활용으로 해상왕국 건설
* 문헌에 기록된 장보고의 이름
문 헌 명
성 명
비 고
『삼국유사』
弓巴(궁파)
일반 백성은 당시에 성이 없으므로 이름 이 弓巴일 것임
『삼국사기』 신라본기
弓福(궁복)
弓巴가 의미가 있는 한자식으로 굴절되어
弓福이 된 듯함.
弓福의 弓을 따서 張씨를 칭하고 福을
음절에 따라서 保皐의 2자로 나눈 것.
〃 장보고 열전
張保皐(장보고)
『신증동국여지승람』
弓福(궁복)
『신당서』
張保皐(장보고)
『속일본후기』
張高(장보고)
일본에서 高라고 표기. 장보고가 청해진대사로서 부와 권력을 장악한 무역왕임을 상징한 호칭인 것으로 추정.
入唐求法巡禮行記(円仁)

<청해진이 있었던 장도>
2. 장보고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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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4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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