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퇴계의 사적 지위와 일본유학과의 이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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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사적 지위
1. 주자 이후의 1인
2. 이기 철학
3. 도학과 그 성격
4. 거경존양
5. 기질변화의 수양학
6. 도란 인륜의 도, 천지의 도
7. 제 2의 왕인

Ⅱ. 일본유학과의 이질성
1. 존심의 학과 대의명분의 학
2. 조일중 삼국의 주자학
3. 원전영부와 이퇴계

본문내용

것이다. 그리하여 그 철학사상과 수양론은 李退溪에서 받은 바가 多大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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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朝日中 삼국의 朱子學
중국 청조의 朱子學은 문헌실증적인 朱子學 연구로서는 발전하였지만 청조가 멸망할 무렵에 단 한사람의 순국자도 나오지 않았다. 조선조의 朱子學계에서는 李退溪, 李栗谷과 같은 大儒가 나타났지만 붕당의 정쟁을 되풀이하여 국력의 쇠퇴를 가져오게 하였다. 한일병합때 의병을 일으켜 순국한 사람은 그 학파에서 적지않게 나타나 있지만 국력의 배양의 기틀로는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幕藩체제의 안정화에 기여하여 300년의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明治유신의 사상적 일대 원동력으로 되어 국력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 원인은 복잡하여 단순히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청조의 경우는 이민족이 지배하는 정복왕조였기 때문에 청조는 朱子의 존왕양이사상을 환골탈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조선의 경우는 조선사회는 혈연과 사제관계의 인연을 대단히 중히하는 사회구조로 되어있다. 따라서 血緣, 師緣에 의해서 각각 굳게 단결하여 혈투를 되풀이, 민족으로서 단결하는 힘으로 결부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해서 일본은 단일민족이며 그리고 천황을 숭배하는 전통적 심정을 딛고 朱子學을 주체적으로 일본화했기 때문에 위대한 사상적 힘을 발휘하기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도를 넓게 하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공자의 말이 있는데 공자나 朱子가 강조하는 道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나라가 발흥도 하고 쇠약도 하게 된다는 사실을 朝日中의 朱子學 발전의 자취를 회고할 때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3. 元田永孚와 李退溪
마지막으로 元田永孚와 李退溪와의 관계에 언급해 두고자 한다. 元田永孚는 明治天皇 寶令 20세부터 侍講이 되어 천황의 절대한 신뢰를 받았으며 明治의 교육지침 확립에 절대한 기여를 한 사람이다. 明治 초년경 일본이 서구사상의 세례를 받았을 때 문부성이 고래의 인간교육의 이상을 망각하고 한 길로 실용주의적인 입신출세주의적이고 과학만능주의적인 교육주의를 모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수주의자가 배타적인 편협한 국수주의적 교육주의를 주장하여 일본의 교육주의가 좌우로 분열되어 크게 동요하고 있을 때 우로도 좌로도 편중 않는 중립적인 교육주의를 정립하는데 가장 힘을 경주하여 明治天皇을 보좌하여 마침내 敎育勅語의 煥發에 진력하여 「明治 제일의 공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元田永孚이었다.
그런데 이 元田은 大塚退野의 門流 橫井小楠을 스승으로 또 친우로 삼아 그 감화를 가장 많이 받았다. 그 元田이 「정주학은 조선의 李退溪에 전해져 退野선생은 그의 所撰인 『朱子書節要』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다. 나는 지금 退野의 학을 이어 이것을 今上황제(明治天皇)에게 바친다.」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은 松田甲의 『日鮮史話』에 인용되어 있는데 「元田家文書」 속에는 李退溪에 언급하고 있는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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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元田은 大塚退野을 篤信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시에 「海內名儒可屈指, 道德眞傳誰邪是, 鳴呼非林非伊又非崎, 吾服東肥兩夫子」라고 있다. 「東肥兩夫子」란 肥後의 大塚退野과 그 문인 平野深淵이며 이들이야말로 도를 진실히 전한 사람이다. 도덕을 참되게 전한 사람은 林羅山, 伊藤仁齋, 山崎闇齋가 아니라 大塚退野, 平野深淵 그 사람이라고 읊고 있다. 그리하여 大塚退野는 李退溪의『自省錄』,『朱子書節要』를 숙독하여 심안을 열었고 그 2書를 「신명과 같이 부모와 같이」 소중히 한 사람이다. 그리고 元田은 李退溪를 「古今絶無의 眞儒」라고 존경한 橫井小楠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이었으므로 元田이 간접적이면서도 李退溪에 경도했던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전에 조선에서 「敎育勅語의 초안자 元田永孚의 학은 李退溪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교육칙어는 李退溪에서 나왔다」는 설이 유표되었으나, 이것은 매우 비약이 많은 잘못된 의론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敎育勅語는 유교윤리를 근저로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본 고래의 皇道主義, 水戶學의, 皇道主義에 의해서 관통되어 있다. 교육칙어=유교윤리가 아닌 것과 같이 元田永孚의 사상이 그대로 李退溪의 사상일 까닭은 없다. 그러나 수신수양을 교육 제일의에 두는 생각은 간접적으로나마 李退溪와 일맥의 관련이 있다.
明治 19년, 明治天皇은 東京대학에 行幸하여 학내를 시찰하였을 때 서구의 학술을 考究하는 학과는 갖추어 있는데 「수신을 주로 하는 和漢의 고전」의 학과가 欠해 있음을 괴이하게 여기어 이래서야 일본의 장래는 위태롭다고 생각하여 그 旨를 元田에게 간곡히 당부했던 것이다. 元田은 이것을 「聖諭記」로 기록하고 있다. 和漢의 고전을 특히 「수신을 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데에 주의해야 할 것이며 단순히 객관적으로 또는 방관적으로 사물을 고구하는 서구의 학술이 아니라 인륜의 도를 주체적으로 스스로의 문제로서 추구하여 참된 자주성 주체성을 자기에 확립하는 和漢의 학을 고구해야 할 것임을 說喩하신 점은 크게 우리들이 마음에 새겨두지 않으면 안되는 바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인 관찰만으로 하는 주체성, 자주성은 결코 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元田도 明治天皇과 같은 생각이었으며 이 점에야말로 李退溪의 사상과 일반의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요컨대 山崎闇齋나 元田永孚의 학은 결코 그대로가 李退溪의 사상은 아니라는 말이다. 山崎도 元田도 공히 일본의 국체에 맞추어 시세에 적합하게끔 朱子學을 변용하여 상당히 이질적인 것으로 형성시킨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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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질적인 면이 많이 그 사상의 근저에 있어서 李退溪의 學恩을 입은 점도 결코 적지 않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되겠다. 楠本碩水는 「李退溪는 朱子를 배우고, 山崎闇齋는 朱子를 탐구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李退溪는 駁雜으로 흐른 朱子學을 순수하고 易簡直截적인 실천적 수양학으로서 「小成의 朱子」라고 일컬을 만큼 학덕을 이룩했다. 한편 山崎闇齋는 朱子學說을 徹底的으로 탐구하고 그리하여 일본화하여 국운의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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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사상이 역사에 그 활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이들 학자들의 사상과 행동을 보면 쉽게 수긍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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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4.26
  • 저작시기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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