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학연구 제2집』에 대한 전두하씨의 서평을 반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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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학문의 도는 氣質의 美·惡에 매이지 않고 오직 天理를 아는 것이 밝은가 밝지 못한가, 천리를 행하는 것을 다 하였는가 다하지 못하였는가의 여하에 있다
전씨는 타인의 진의를 도외시하고 비집고 들어갈 틈만 있으면 물고 늘어지는 病通이 있는 것 같다. 왜 그렇까? 고의에서냐? 아니다. 분석의 치밀 때문이냐? 아니다. 그것은 퇴계가 말했듯이 "고집이 세어 혼자 고상해 하고", "한 때에 한 사람을 이김"으로서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心緖에 연유하는 것이리라.
氏의 이러한 병통은 한박사의 논문 20쪽 및 각주 28, 59, 61의 글은 각각 고봉의 말과 관점이라 하여 그것을 착오라고 지적한 데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고봉의 반박을 퇴계 자신이 수긍하고 그의 의견에 동조한 이상 어찌 착오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퇴계의 사상은 모두 伊川·晦菴의 말과 관점이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끝으로 한박사의 논문은 퇴계의 理氣論의 변증변적 해석을 헤겔 변증법의 해설을 통하여 논박한 것이며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과제의 하나라고 필자는 보는데 전씨는 도리어 엉뚱하게도
同논문의 주제와 아무 관계가 없는 엉뚱한 '헤겔 변증법 공격'에 짧은 논문의 아까운 지면을 할애했다
고 비난한다. '헤겔 변증법의 해설'과 '헤겔 변증법 공격'의 구별조차 못하는 輕擧妄言에 대해 필자는 충고니 조언이니 하는 氏의 오만한 태도를 탓하기 전에 오히려 측은함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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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필자의 논문에 대한 전씨의 비판을 반박하기로 한다. 氏의 비판은 그 모두가 이해부족이거나 독단적 추측에서 나온 것이다. 첫째로 氏는
理의 動은 바로 理顯이기에 그것은 밝히면서 숨기는 것 (同上 5·6합집261쪽)
이라고 한다. 이 해석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하이데거의 '존재'에서 추측한 것에 불과하다. 필자는 이미 하이데거의 '존재'가 헤겔의 변증법과 같이 절대자(존재)의 자기한정으로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縷說하였거니와, 理顯을 理動으로 보는 데는 두 가지의 모순이 있음을 지적해 둔다. ①理는 所以然之故요 所當然之則으로서 만물의 주재자가 아니면 안된다. 氏의 말대로 理가 動하는 것이라면 理를 動하게 하는 자가 따로 있어야 한다는 부조리에 빠지게 된다. ②理氣철학의 체계에서 "'氣, 動靜也"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定理이다. 이것을 어기고 理動이라고 한다면 굳이 理와 氣를 구별할 필요조자 없는 동일성에 빠지게 된다. 이렇듯 理顯을 理動이라고 하는 것은 氏의 독단적인 추측에 불과하다. 씨와 같이 성리학뿐 아니라 유학사상의 전체계를 헤겔 변증법으로 해석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이현'을 '이동'으로 풀이한다면 퇴계철학은 근본적으로 파괴될 뿐이다.
氏는 顯現하는 理에 "自己限定作用"이 全無하다면 '理一分殊'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나, 理는 "淨潔空 底世界"라는 一句를 읽으면 곧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氏는 '理靜氣動'이라는 理氣철학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理靜을 부정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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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一이 어떻게 그대로 곧 理分殊겠는가 (同上)
라는 독단적 회의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理氣共在의 이원론을 변증법적 일원론으로 해석하려는 사고방식의 소치라 하겠다. 씨는
'理靜氣動'이기에 '理는 無情意·無計度·無造作·無形迹'이라는 주자의 '우주론에만 한정된' 원리를 따르기만 하는 것은 퇴계의 '理發'의 본뜻을 이해함에서 경계되어야 할 태도라 본다 (동상 5·6합집 262쪽)
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퇴계학이 程朱學의 정통을 계승했다는 것은 천하가 공인하는 說인데 氏의 억측이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인가. 호언장담도 정도껏 해야 될 것이다.
둘째로 필자가 '發'자를 顯現이라고 말한 데 대해서 씨는 동감을 표했으나, 이 동감의 저의는 理顯을 하이데거의 '존재'의 開明과 은폐로 해설하려는 독단에서 나오는 자기도취에 지나지 않는다. 理(본성)은 末發이요 靜이며, 다만 動靜하는 氣에 의하여 은폐될 때는 氣强이요, 이와 반대로 氣弱일 때는 理가 顯現하는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말하는 '發'의 참뜻이다. 氏가 말하는 것처럼 '자기한정'으로서의 理顯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셋째로 "一而二·二而一"의 필자의 해석에 대하여 씨는 변증법적 입장에서 도리어 필자가 "독자를 너무 얕보는 인상을 주었다" (同上)고 하나 학문하는 자세는 독자에 영합하는데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진실에 있는 법이다. 씨는
그것이 '二인' 理와 氣의 '對待관계'를 나타낸 말임은 程朱學에 속하는 理氣論의 상식이다 (同上)
라고 호언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氏는 ''대대관계'를 변증법적 대립으로 보고 있지만 이 대대관계라는 것이 기실 理氣共在를 뜻함은 도리어 정주학의 상식에 속한다는 사실을 氏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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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로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관한 것이다. 氏는 필자에 대해서 이렇게 평하고 있다.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의 관계의 천착이 '불철저'하기 때문에 '四端의 善'과 '七情 가운데서 善인 경우'라는 두 善의 성격차가 '뚜렷이' 드러나지 못했다는 감이 없지 않다 (동상)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理氣共在의 원칙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성리학자에서 '형이상'과 '형이하'라는 말이 빈번히 나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그 개념을 先秦시대 周易의 입장에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先在를 의미하기 때문에 '형이하'의 外在이며 성리학에서는 '형이하'에 내재하는 형이상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共在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본시 인간은 본연과 기질의 이중적 구조를 가지는 존재다. 이른바 사단의 所從來는 본연지성이요 칠정의 所從來는 기질지성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事理는 자명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전씨와 우리의 견해가 상이한 소이는 퇴계선생이 말했듯이 도가 같이 아니함이요,
道가 같이 아니하면 말이 많은 것은 도리어 道를 해친다 (答奇明彦 論四端七情 제2서 改本 後論)
그러므로 우리는 '단절의 윤리'를 선언하면서 다음 한 구절을 부기해 둔다.
-576-
雖然亦有二焉 其心求勝而不撥諸道者 終無可合之理 只待天下之公論而已. 志在明道而爾無私意省 必有同歸之日 此非達理好學之君子不能也. (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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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4.30
  • 저작시기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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