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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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I. 서론

II. 본론
1. 임나일본부란?
(1) 임나일본부설
1) 임나
2) 일본부
2. 임나일본부설의 성립과 영향
3. 임나일본부 근거 자료
(1) 일본서기
(2) 광개토대왕비
(3) 칠지도
(4) 송서
4.임나일본부 설과 그 모순
5.임나일본부설의 새로운 연구동향
6.임나일본부 레포트쓰면서 느낀점

III. 결론

본문내용

인 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는 일본인학자의 연구결과 중에서 왜왕권의 임나지배를 부인한 최초의 것으로 주목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가야지역에서 왜인들의 집단적 거주가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한편, 우케다는 사료상으로 임나일본부는 6세기 전반의 안라에 있던 일본부만을 가리키며, '일본부'의 고훈은 '야마토노미코토모치'로 그 뜻은 일본왕 이 임시로 파견한 사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1970년대에 들어서 면서 쓰즈키 야스타미, 우케다 마사유키, 오쿠다 쇼우, 키토우 키요아키 등에 의하여 확입되었으며, 근년에 한일고대사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해석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 었다.
또한 야마오는 {일본서기}의 기사들을 재검토하고 백제사와의 관련성을 첨가하여 왜왕 권이 임나경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5세기 후반에 백제의 대신이면서 임나의 지배자 였던 목만치가 왜국으로 이주한 이후부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맞이함으로써 임 나에 대한 연고권을 가지게 된 왜왕권이 가야지역에 관인을 파견하여 구성한 것이 임 나일본부라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근래의 일본인 학자들에 의한 임나관계 연구경향 은 종래의 임나일본부설에 비하여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
첫째, {일본서기}의 5세기 이전 사료의 신빙성을 부인함으로써 임나일본부의 성립시기 를 4세기 중엽으로 설정하는 고정적 관념에서 후퇴하고 있으며, 대체로 그 문제를 6세 기 전반으로 제한하여 보고 있다. 둘째,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왜왕권이 임나를 군사통 치하기 위하여 설치한 지배기관이라기 보다 왜왕권이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독점적으로 수용하기 위하여 임나에 파견된 사신 또는 관인집단으로 보고 있다. 셋째, 임나일본부 의 존립이유를 왜의 군사적 압제에서 구한다기보다 백제 신라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려는 가야제국의 자주적 의지에서 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의 변화는 종래의 임나일 본부설에서 일단 진일보한 것이라고 인정된다. 한편, 국내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스에마 쓰의 임나일본부설을 금기시하여 외면하고 체계적 반론을 펴지 않고 있었으나, 1970년 대 후반 이후로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천관우는 {일본서기}의 임나 관계 기록들을 재해석하여 그 기사들의 주어를 왜왕이 아닌 백제왕으로 고쳐서 읽음으로써 '왜의 임나지배'가 아닌 '백제의 가야지배'라는 시각으로 가야사를 복원하 고자 하였다. 그는 근초고왕이 369년에 가야지역을 군사정벌하여 이를 백제권에 편입 시키고 나서 백제가 가야지배를 위하여 설치한 파견군 사령부가 이른바 임나일본부라 는 것이라 하였다. 김현구는 임나일본부가 백제의 가야통치를 위해 설치한 기관이라는 천관우와 같은 견해에서 6,7세기 백제 야마토 사이의 외교관계의 특징을 용병관계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용병은 백제가 왜에 선진문물을 전수하였던 반대급부이며, 왜 계통 의 인명에 대해서는 일찍이 일본열도에서 백제에 이주하여 백제왕의 신하 노릇을 하고 있던 왜계통의 백제인 이라고 규정지었다. 이렇게 볼 때 근래의 국내학자들에 의한 임 나관계 연구경향은 백제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다.
6. 임나일본부 레포트쓰면서 느낀점
일본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한다는 생각 밖에 안든다.
종군위안부, 임나일본부, 독도문제 등 너무 많은 역사들을 왜곡하고 있는게 지금 현실 이다. 이런 문제들은 앞으로 꼭 청산되어야 할 문제들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고생을 너무나 많이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일은 바로 자료를 찾는 것이었다. 제법 큰 서적을 두어 시간 뒤져서 찾아낸 책이라고는 한자 투 성인 책밖에 찾아낼 수 없었다. 쉽게 말해 일반인이 읽을 수 있는 쉽고 상세한 해설서 는 없었단 얘기이다. 책은 읽는 사람이 있어야 만들어진다. 이 책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 것에 사람들이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다. 앞으로 어려운 한문들이 많이 있는 책에는 그에 대한 해설 책들이 곁들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 도 관심을 갖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 일본에서는 학교 수업 시간에 임나일본부 같은 식민사관에 대한 수 업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반면, 우리 나라는 지금 현재 대부분의 학생들이 임나일 본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뿐만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임나일본부라는 말 조차도 모 르고 있다.
앞으로 이 문제는 꼭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세계 학계에 엄청난 돈을 뿌려 가며 많은 학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있 다. 언젠가 임나설은 사실에 관계없이 정설로 인정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오직 반복될 뿐이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인가? 이번 숙제를 하면서 이러한 문제에ㅐ 대해 많이 생각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III. 결론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라는 『일본서기』, 광개토대왕비문, 칠지도, 송서, 가야지역에서 확인한 문헌과 고고학적 유물들 어디에서도 임나일본부의 확실한 증거는 없다. 결 국 고대 일본이 4세기부터 6세기까지 200년간 고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 나일본부설은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은 사실을 왜곡해 임나일본부라는 허구의 역사상을 만들어 조선 침략의 명분 으로 삼은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 필요한 자원을 한반도에서 조 달하려는 의도가 결국 임나일본부라는 허구를 창조해낸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임나일본부는 양측이 평행선을 달리며 서로 다른 논지를 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역사는 분명히 당시의 사실을 정확히 고찰해 내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任那日本府는 韓·日 양국의 감정적 차원이 아니라 학문적·이성적 차원에서 그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수반될 때 안개에 싸여있는 그 시대의 역 사가 그 실체를 드러내고 올바르게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이기백, 『한국사시민강좌』제3집, 일조각, 1988.
이기백, 『한국사시민강좌』제11집, 일조각, 1992.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 『한국고대금석문』, 1992.
박천욱, 『교과서보다 쉬운 독학 국사』1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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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2.05.10
  • 저작시기2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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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9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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