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연맹원 학살사건 - 서부경남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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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부경남에서도 수천명 학살]

2. [특무대의 조직적 범행]

3. [독립운동가도 학살]

4. [도처에 널린 유골]

본문내용

면장(1994년 퇴임)이다.
구씨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 16세의 청소년이었다. 1950년 7월 말로 기억되는 어느날 오전 11시쯤 신촌마을에 있던 구씨는 난데없는 차량들이 멀리서 행렬을 지어 관지리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신촌마을로 들어서기 전 삭평마을 근처에서 차량의 행렬이 멈춰섰다. 이윽고 3대의 버스에서 내리는 2백여명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줄에 묶여 있었고 머리에는 용수(얼굴가리개)가 씌워져 있었다.
그들은 곧 관지리 신촌의 화령골짜기로 들어갔고 얼마후에는 콩볶는 듯한 굉음이 메아리쳤다.
박우희씨는 “미군이 자행했던 학살은 보도연맹원이 당한 학살사건과 비교하면 별 것이 아니다”면서, “진주지역 보도연맹원 학살은 진주의 특무대장 탁소령이 저지른 만행이며, 좌익제거라는 미명하에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 같은 정적제거에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핑계로 당시 진주의 인물들이란 인물은 다 죽였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보도연맹원 학살을 “반드시 밝혀져야 할 우리나라 최대의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왕지리 박종표(67·현 명석면사편찬위원회 감사)씨는 보도연맹원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의지가 어느 누구보다 강하다.
그는 일제 때 애국계몽운동가였던 자신의 부친을 보도연맹사건으로 잃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보도연맹원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외면한 채 미군의 학살만 강조하는 건 설득력이 없다”고 강조했다.
현재 명석면에서는 명석면사 편찬작업이 이뤄지고 있는데, 여기에 면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었던 보도연맹사건과 이곳에서 일어났던 대학살을 밝히는 진상규명 작업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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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5페이지
  • 등록일2002.10.06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5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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