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의 중심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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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두 얽매엿던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다(직설법 롬7:4,6 갈2:19).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적 의로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명령법 비교 롬10:3,4 갈2:21 5:4).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된다(롬7:6 8:2 갈5:18). 바울은 율법주의자도 아니요 율법퍼ㅖ기자도 아니었다(롬3:31). 그는 율법에 매인 육신을 좇지 아니하고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육신의 죄를 심판하신 그리스도의 영을 좇아 행하는 자에게 오히려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는 것을 확신하였고(롬8:3,4) 이것이 율법의 의와 반대로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임을 선포한 것이다(롬1:17 3:21-31 갈2:16 3:11). 우리는 구속 역사적으로 이 직설법에 근거하여 명령법을 이해할 수 있듯이 또한 아직 아니(not yet)도 이미(already)에근거하여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본론에서 종말론의 논리상 아직 아니와 이미를 논술하였지만 결코 이것이 논리 자체를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않된다. 우리는 이미 성취된 구속의 영역에 들어갔기 때문에 아직 아니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새 셰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아직 잔존해 있는 옛 시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에 근거할 때만이 아담 안에서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바울이 제시한 논증의 어려움을 해석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아직 아니와 이미 관계 및 아담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관계를 단지 논리 자체를 위한 해석이 아니라 바울의 구속역사적 해석을 하니 않으면 안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아담 안에 있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었다.마찬가지로 우리도 구속역사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영역에서 아담 안에서 남아 있는 영역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 아담 안에서 남아 있는 죄, 사망, 율법, 세상 등 옛 창조질서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종결되엇고 의, 생명, 은혜 등 새 창조 질서가 이루어졌다. 아직 아담 안에서 남아 있는 옛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무덤 속에 장사되었고 우리는 새 사람이 되었다. 즉 아직 아담 안에 있는 죄, 사망, 율법, 세상 등 옛 창조질서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종결된 질서로서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다만 나타나 있을 뿐이다. 이같이 그리스도의 구속역사에 근거한 종말온 및 구원론은 세상적 논리의 소산이 아니라 신앙적 논리의 소산이다. 이 사실은 가시적 육신의 눈이 아닌 비가시적 영의 눈으로만 그 파악이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의 직설법과 명령법관계, 이미와 아직 아니의 관계, 그리스도 안에서와 아담 안에서의 관계는 구속사적인 신앙적 논리로만 해석되어야 한다. 이 구속역사에 근거할 때만이 바울의 종말론을 그리스도의 재림에만 연결시키는 오히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그의 구원론에서도 칭의, 성화, 영화 등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 흔히 칭의는 신자 생활의 시작이며 성화는 생명의 발전을 가리키는 것이며 또한 영화는 그리스도의 재림과만 관계시키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이 모든 사실은 바울의 구속역사관과 완전히 거리가 멀다. 칭의는 법정적일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이다. 바울은 칭의를 신자 생활의 시작으로 말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종말론적인 칭의를 받았다(롬5:1.9 6:7 8:30 고전6:11). 그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가 없는 것이다(롬5:9 8:1).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심으로 우리는 미래의 무죄판결을 이미 받은 것이다(비교 히10:17,18). 또한 성화에 있어 거룩은 윤리적 행위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윤리적 무죄 상태에 대한 언급이다. 성화는 도덕적 성장에 대한 동의어가 아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혹은 어떤 의미로 하나님의 봉사에 속한 것으로 의미된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거룩의 직설법에 근거하여(롬1:7 15:25,26 고전1:2 14:33 골3:12 비교 출19:5,6 12:16 레23:2) 거룩할 것을 명하는 것이다(롬6:19). 즉 거룩한 신분에 합당한 거룩한 상태의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비교 엡4:1 빌1:27 골1:10).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거룩하게 하심으로(엡5:26)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된 것이다(고전3:16,17 엡2:21). 그러므로 바울은 그 부정한 고린도 교회까지도 성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 자로 부를 수 있었다(고전1:2,30). 이와 같이 성화는 얻어진 어떤 도덕적 특별한 성질이 아니라 주어진 하나님께 대한 관계이며 바울에게 있어 거룩함의 범주들은 도덕적 활동 그 자체 보다 새로운 도덕적 상태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또한 영화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발생할 부활과만 관계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구속역사적으로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소유하였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영화를 누리고 있음을 의미해 준다. 그러므로 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미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하였으며(롬5:1-2)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고 선언하는 것이다(롬8:30).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전히 나타날 영화를 우리는 이미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에 있어서도 딛 3:5 등에 나타난 중생( )은 생명의 이식 등으로 이해되어온 전통적 의비가 아니라 종말론적 새 창조적 의미를 가진다. 이와 같이 우리는 칭의, 성화, 영화, 중생 등을 구원의 서정으로 해석하지 않고 구속역사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결론을 보게 되었다. 칭의, 성화, 영화, 중생 등 이 모든 사실들은 발전해 가는 과정의 각 사건들이 아니라 단 한나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구속사건의 여러 면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았다. 바울은 이러한 종말론적이고 구속역사적 관점으로 로마서의 구원론에서 칭의, 성화, 영화 등을 길게 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로마서 구원론을 대할 때에 구원의 서정으로서 칭의-성화-영화를 순서적으로 구원을 해석해서는 않되고 이들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구속사건 아래서 단 하나의 사건의 여러 다른 표현임을 알고 이 전부를 동시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할 것이다.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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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2페이지
  • 등록일2002.10.16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6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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