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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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 없다, 그것은 사실은 신약 신학자가 왈가불가할 바는 아니지마는 신약 신학적인 입장에서 구약 율법을 보면서 여기에 대한 대답을 한다며는 구약 율법의 발전 과정이 있다. 고 해야만 신약 신학적인 논리가 확립이 됩니다. 또 하나는 바울 사도의 율법관과 예수님의 율법관인데 제가 말씀을 드리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율법관과 예수님의 율법관이 같다, 다르다, 그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방법론적인 면에서 먈약 기독교적인 율법관을 찾자면 그에 대한 주제가 출발점인데, 바울 서신을 걸쳐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논지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바울 사도와 예수님 사이에서 정말 충돌이 일어난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다행히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때에는 예수님을 시키고 혹은 예수님을 번거롭게 해서 바울사도의 율법관, 혹은 바울사도의 언급들을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일관성을 띤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바울사도의 얘기를 특수한 것으로, 가히 일반적인 것이라면 예수님의 말씀 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이해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실마리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만약 기독교적인 율법관을 찾아서 구약 율법을 어떤 변모한 형태로, 변화한 형태로 우리 시대에 적용할 수 있다면 거기에 대한 출발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바로 그런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사역을 구약 율법과 관계해서 어떤 것으로 보았느냐, 바로 그 점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율법관이 각각 다르다. 아까 제시했던 바로 그러한 과제들을 통해서 계속 찾아 보아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율법 - 자체는 선하다.
-->죄를 짓도록 충동질
바울이 설명하지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음
율법의 논질과 연속성, 율법의 본질을 승화
바울이 크리스챤의 삶을 설명할 때
<논 평>
마태복음을 전공하신 분이기 때문에 특히 마태복음의 관점에서 얘기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특히 정교수님이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배타하신 것이 아니다. 또는 거부하신 것이 아니다. 연속적인 면을, 이미 과거에 있는 것을 어떤 면에서 승화시킨 것이다. 퇴화시킨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발언을 꽤 많이 하셨어요. 실제로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 안에서 해야 한다는 그런 표현을 쓰고 있는데, 뿐만 아니라 이 율법이란게 바울은, 율법 때문에 죄악에 있는 인간들이 죄를 더 짓게 되고 이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죄를 깨닫게 만들고, 죄를 인식하게 만드는 그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이 죄를 짓는 일에 하나의 충동질을 가하는, 율법 자체는 선한 것 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이 마태복음에서는 전혀 안나오지요. 예를 들면 우리가 사랑이란, 사실 율법 본질 자체
가 사랑인데, 우리가 성령을 좇아 살다보면 사랑이 실천된다고 얘기함으로써 성령 안에서의 삶,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사실 율법과 배치된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본질의 하나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율법의 본질을 어떻게 하면 더 승화시킬 수 있는 그런 삶을 산다고 하는 점에서 분명히 바울의 율법의 규범성을 인정하고 있고, 분명히 그가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율법을 얼마나 많이 인용하고 있는지 몰라요. 크리스챤의 삶에 인용을, 적용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가 그렇게 긍정적이고 연속적인 면을 많이 얘기 하면서도 상당히 그 율법에 대해서 부정적인 그런 얘기를 많이 하고 있어요. 아까 좋은 얘기를 하셨는데, 전적으로 그 얘기에 제가 찬동하는지 모릅니다. 그게 뭐냐하면 율법 자체가 이스라엘 민족사 속에서 주어졌다고 하는, 특별히 이방, 열방에 둘려 싸여 있는 이스라엘 민족사 속에서, 시내산에서 특별히 율법을 주시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율법을 지킴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이방 민족과 절대로 섞여서는 안된다. 율법을 통해서 너희들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을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율법 자체가 민족적이고 특수적이고 좀 뭐라고 할까요? 배타적인 어떤 그런 요소가 되어 버렸어요, 사실, 민족사 속에서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이 율법이 범 세계적인 그러한 점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찬동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렇게 메디칼하게 율법에 대해서 부정적인 관점을 왜 갖게 되었는지, 아마 그 역사적인 배경은 아마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이 이 하나의 땔감이 되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유대주의 자들이 자꾸 율법을 주장하면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정의를 자꾸 할려다 보니까 바울이 이제 율법을 비판하게 되고 율법이 도대체 뭐냐? 심지어 갈라디아서, 로마서를 읽다가 보면 완전히 율법으로 말이조, 죄를 또, 어떤 사람은..... 율법이 더 충동질하는, 롬 7장에 쓰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이 그런 점에서 상당히 마태와 조화시키기가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 않는가? 바울의 그 부정적인 견해들이 과연 어디서 왔는가?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의 회심쪽에, 다메석 도상에서의 사건에 상당히 영향을 받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이론적으로 불법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한다기 보다는 바로 그 문제가 배경에 있는 어떤 사람들, 그가 싸우던 사람들, 자기 자신에게 혹은 교회에 율법의 문제가 대두됨으로 말미암아 후에 보다 더 과격하게 될 수도 있고, 혹은 또 다른 면을 지적할 수도 있고, 제가 지적했던 것은 바울 사도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원칙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면이죠! 만약 거기에 동의 하신다면 에수님 당시의 율법에 대한 그런 심각한 논의가 발생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마태복음에 그러한 문제들이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발생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수립되고 발전해 나가는 과정속에서 율법 문제, 혹은 율법 논의가 예수님 당시 보다는 좀더 첨예하게 퍼지고, 확대된다든가 교회사가 보여 주는 것인데 그러한 면에서 마태복음의 율법 논쟁이 보다 초보적인 단계를 띠고 있다면 그 문제에 있어서도 저는 공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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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4페이지
  • 등록일2002.10.16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6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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