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제도의 신학적 배경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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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장로직제 역사적개관

3. 장로정치제도의 성서적 근거

4. 장로교 정치제도의 성경적 기원에 대한 조명

5. 결론

본문내용

용어는 바로 "pastoring"한다는 의미이다. 감독이 바로 "pastor"의 사역 즉 목회사역을 한다는 의미는 교회 지도자들 전체가 감독이나 장로로서 목회사역을 한다는 뜻이다. 결국 장로의 사역이 감독의 사역속에 흡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는 벧전 5:1-4등에서도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엡 4:11절에서는 목사들이 모두 장로감독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바울은 목사들의 직분속에 장로들을 포함시켜 포함하는 용법 외에 사도행전 20:28절에서는 교사들의 직분까지도 포함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엡 4:11절에 나타나는 "목사들과 교사들"이라는 표현은 두 부류의 다른 신분의 사람들로 분리해서 해석하지만 사실은 목사들이 곧 교사라는 표현이다. 그 이유는 교사들(teachers)앞에 정관사(the)가 없다. 특히 엡 4:11절에 이는 목사들이 곧 교사라는 뜻이다. 그리고 목사들과 교사들이 하나의 그룹에 속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마 바울은 교사들을 목사들의 그룹으로 보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보면 바울의 교회 직분에 대한 개념은 대체로 모든 장로들이 목사의 직분이나 교사의 직분이 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목사/장로들과 또 한편으로는 다스리고 장로/목사들로 그 기능을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때로는 한 사람이 가르치고 다스리는 경우도 발견된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와의 관계를 신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이해하려면 목사와 장로직제의 관계를 일치와 조화의 관점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5. 결론
장로교회의 정치제도가 본격적으로 적용된 곳은 스코틀랜드였지만 그것의 온상은 제네바였다. 존 낙스(Jhon Knox)를 통해 스코틀랜드에 장로교회가 뿌리를 내린 것처럼 제네바에서는 존 칼빈(Jhon Calvin)에 의해 장로정치제도가 시도되었다. 그러나 칼빈의 장로정치제도 사상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성숙해졌고 그 곳에서는 장로정치제도의 실현가였던 부쳐(Martin Bucer)가 있었다. 스트라부르그의 부쳐가 장로정치제도를 시행할 때에 그에게 영향과 용기를 주었던 또 다른 장로정치제도의 선구자가 부쳐 뒤에 있었다. 그는 바로 바젤(Basel)의 오오코람파디우스(Oecolampadius)였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이전에(15세기 중반) 보헤미안 계통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장로들이 교회를 관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장로정치제도를 구체적으로 발전시킨 가장 중요한 개혁자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동역자들의 견해에 성서적 근거를 부여하여 장로교제도의 확실한 제도를 구축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스트라부르그에서 제네바로 다시 돌아왔을 때 칼빈은 장로정치제도의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적용시키려고 노력한다. 칼빈이 인용한 성경구절들에서 장로정치제도는 개혁교회의 참교회 회복을 위해 신적, 교회적인 기원을 가진 것으로 이해함을 볼 수 있다. 이 점을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다.
"고전 12장 28절에서는 다스리는 자들은 내가 믿기로는 감독들과 더불어 도덕의 견책과 치리의 업무를 맡은, 사람들로부터 뽑힌 장로들이다. 로마서 12장에서 부지런하므로 다스리게 하라는 바울의 말을 아무도 다르게 해석할 수 없다. 초대교회는 그러므로 처음부터 잘못을 교정하는 재판권을 가진 거룩하고 엄정하고 경건한 사람들 가운데서 뽑은 원로회(senate)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의 경험 자체가 이러한 종류의 체제(order)는 한 시대에 국한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통치 관리의 직분(office of government)은 시대에 필요한 것이다."
) Inst. Ⅳ. 3, 8.
장로정치제도의 성경적인 기원을 검토해 본다면 사도들은 분명히 장로정치제도를 초대교회의 모델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나 초대교회의 장로정치사상은 새로운 발명품은 아니고 헬라 문화나 근동지역의 이방세계에 편재해 있던 장로정치제도를 모방했던지 아니면 회당이나 산헤드린의 장로제도를 수용한 것은 확실하다.
사도들의 시대나 초대교회에서 목사와 장로와의 관계는 기능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분리나 구분도 가능하겠지만 직분에 있어서는 공유개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장로의 직분이 다른 직분들과 불가분의 관계로 초대교회에 있었으며 또한 교회의 행정과 치리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지만 여전히 목사를 보필하는 고문이요 원로격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점에 있어서는 칼빈도 마찬가지였다. 칼빈이 목사와 장로직제를 연계해서 설명할 때는 언제든지 장로는 "목사와 함께" 사역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감독의 독재를 극복하기 위해 장로를 세우지만 여전히 장로와 함께 감독/목사 중심의 교회정치제도 체제를 구상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감독 없이 교회가 없다"(no bishop no church)는 초대교부들의 교회론에 충실하였다.
칼빈은 감독/목사 중심의 교회체제(order)를 주장하지만 동시에 교회정치에 평신도의 참여의 문을 열었다. 1400년간 성직자들에 의해 다스려 왔던 교회가 평신도의 참여로 적극적인 전환을 한 것이 바로 시정부의 간섭과 국가 권력의 독주를 견제하면서 교권을 회복하려는 민주적인 제도였다. 칼빈은 장로회를 통해 시정부와 조화를 이루면서 교회개혁의 민주적인 방법론을 채택한 것이다.
) 손병호, 장로교회의 역사, 그리인, 1993, p. 136.
한 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려는 전환점에서 장로교제도가 생겨난 역사적, 성서적, 신학적 배경을 바로 이해하고 새시대에도 장로교제도가 새 역사 창조에 역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지평을 확보해 나가야 한다. 장로교제도는 감독 중심의 교회에서 평신도의 민주적 참여의 장을 열었으면서도 목사의 위상을 동시에 보존한 절묘한 제도임을 확인하면서 선현들의 지혜에 감탄할 뿐이다. 장로교회는 목사와 장로, 평신도들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은사를 가지고 참된 교회를 이루어 갈 수 있는 창조적이고 민주적이며 열린 구조를 가진 제도임을 새롭게 확인하게 되는 것은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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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02.10.24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8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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