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주관성과 기독교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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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서 론


II. 간주관성의 개념과 연구 유형


III. 간주관성의 의사소통적 행위 접근

본문내용

에서의 변형은 '비주관성'으로부터 '주관성'으로 바뀌는 것으로 보게된다. 이러한 주체들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는 교육의 과정에도 적용되어, 이미 주체가 된 '성인'만이 아동을 자기책임적 주체로 만들 수 있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을 '실천적 간주관성'으로 파악한다는 의미는 이러한 비대칭적 관계를 대칭적 관계로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간주관성에 대한 이전의 논의가 주로 간주관성을 가능케 하는 철학적-사회과학적 근거에 관한 것이었다면, 비에스타의 간주관성 논의는 그러한 이해의 토대로서 교육활동 자체를 간주관성으로 전제하면서, 교육이 어떻게 재개념화될 수 있는지를 제시하였다는 독특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비에스타의 간주관성은 '실천적 간주관성'의 개념이 시사하듯이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의사소통적 행위나, 빈스왕거가 주장하는 사랑이라는 정서적 토대(사랑)만도 아닌, 인간의 '실천성'(practivity)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다.
둘째, 간주관성에 대한 테오프락시스 접근은 지·정·의의 삼차원적 접근을 통합적으로 시도한다. 간주관성의 개념은 인지적 접근만도, 정서적 접근만도 아닌, 인간의 전체 프락시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할 때, 간주관성의 개념 획득은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러한 통합적 접근은 일종의 '영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휴브너가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영적(spiritual)인 접근'이란 다른 접근들처럼 독립된 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접근을 통합하는 접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브너는 영적인 접근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나는 영적 앎의 양태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대신 영적인 접근은 자신(self)과 타자(others), 그리고 그들의 전통을 아는 양식이다...따라서 다양한 앎의 양식들을 어떻게 영적인 것과 더불어 융합시키는가가 중요하다." 이러한 휴브너의 주장은 '의사소통적 행위'와 '사랑'을 통해 얻어지는 간주관성의 획득이 영적인 매개의 원리에 변증법적으로 통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간주관성 개념에 대한 테오프락시스 접근은 '프락시스'(praxis)의 삶을 가능케하는 '프로네시스'(phronesis), 곧 '실천적 지혜'에 의해서 간주관성의 개념이 형성된다는 측면을 강조한다. 이것은 프락시스 개념 자체가 갖고 있는 자기목적적-해방적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락시스 개념이 지시하는 것처럼, 프락시스는 생산활동으로서의 '포이에시스'(poiesis)와 구별된다. 포이에시스 삶의 목적은 궁극적 생산활동의 목표가 종국적으로 성취되었을 때 획득되지만, 프락시스 삶의 목적은 그 자신 안에 자기목적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프락시스의 삶은 '프로네시스'로 불리우는 '덕'(실천적 지혜)의 실천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간주관성은 프로네시스 혹은 덕을 실천하는 윤리적인 삶의 과정과 그것에 대한 교육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말해, 우리 인간이 '프로네시스'와 관계없이 또 다른 주체(subject)에 접근한다면 그것은 '프락시스'가 아니라 '포이에시스'(poiesis)이며, 그러한 활동을 통해 '공유적 이해'라는 간주관성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조종(manipulation)이나 통제(control)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프로네시스'에 따른 프락시스의 삶은 간주관성과 함께 그 과정에서 해방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의 해방도 궁극적인 최종목표로서의 해방이 아니라, 도덕적 삶으로서의 '프락시스' 자체가 해방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은 양 주체가 갖고 있는 소유 그 이상(moreness)을 경험하는 간주관적 경험이며, 그런 의미에서 영성적 프락시스라 말할 수 있다.
넷째, 간주관성에 대한 테오프락시스 접근은 '공동체성'을 중시한다. 간주관성은 단순히 개인에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그것은 공동체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스미스가 가다머를 해석하면서 해석학적 공동체를 상정했듯이, 간주관성은 바로 공동체를 근거로 한 간주관성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이미 선험적으로 공동체의 일원이며, 공동체의 정신(spirit)을 소유한 존재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팔머가 '실재'를 공동체적으로 파악하면서, 인식도 '공동체적 행위'(communal act)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은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의사소통적 행위를 통해 간주관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공동체와의 의사소통적 대화를 통해 어느 공동체의 정신(spirit)을 소유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정서적 접근을 통해 간주관성에 도달하는 것은 공동체가 갖고 있는 사랑의 독특한 표현양식을 수용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공동체의 한 일원(subject)이 되는 것을 뜻한다.
이상에서 살핀 테오프락시스 접근에 근거한 간주관성의 개념은 기독교교육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이것은 기독교를 개인화된 종교와 객관적 가치지향 종교로부터 그리고 가치중립적인 공적 담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간주관성은 삶의 분야를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으로 양분하는 것을 반대하고, 마찬가지로 지식을 주관적 지식과 객관적 지식으로 이분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어(M. Moore)가 간주관성의 토대 위에서 기존의 종교교육과 공교육의 관계를 재고할 것을 지적한 것은 적절하다. 왜냐하면 삶의 분야를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으로 엄밀하게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종교가 공적인 영역에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순진한 객관성에 대한 태도도 간주관성의 측면에서 수정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종교교육과 공교육의 모든 영역은 '간주관성'의 개념과 '테오프락시스 접근'에 의해 새로운 교육의 의미를 되찾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객관적 지식에 따른 주입식교육(indoctirnation)의 위험성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책임·존경 등과 같은 종교적 가치들은 교육현장에서 새로운 의미로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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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2.10.25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8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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