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사상가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 푸케 : 혁명 재판소의 재판장

1. 혁명의 배경
2. 삼부회와 국민의회의 소집
3. 입법의회 시기
4. 프랑스의 제1공화정
5. 총재 정부와 나폴레옹의 쿠데타

<< 참고문헌 >>

본문내용

소를 두었는데, 일반보안위원회는 반역자를 색출하며, 혁명재판소는 재판하고 처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공안위원회와 그 보조기관은 "공포정치"라 알려진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파리에서만 5,000 여명이 처형되고, 지방에서는 처형된 사람의 수가 2만 명에 달하였다.
혁명정부는 국내의 반혁명적인 요소를 일소함과 동시에, 전쟁수행의 효율적인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것은 전 국민에게 병역을 의무적으로 부과하는 것이었다. 국민공회는 1793년 초에 30만 명에 대한 소집령을 내리고, 18세에서 40세에 이르는 모든 남자의 군복무를 규정하였다. 또 1793년 8월에는 국민총동원령이 선포되었다. 그리하여 과학자는 등록되어 전쟁을 돕고 노동자들은 징발되어 군사업무에 할당되었다.
자코뱅당의 주도하의 프랑스 정부는 대내적으로 국민 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새 기풍을 조성하였다. 먼저 아주 강력한 반(反)기독교 운동이 전개되었다. 교회가 폐쇄되고, 종교적인 조각상이 파괴되었다. 기독교 대신에 이성교(理性敎)가 창시되어 1793년에 노틀담 교회에서 이성의 축제가 벌어졌으며, 로베스피에르는 최고존재에 대한 종교를 창시하였다. 또한 복장에서 남자들은 귀족의 차림에 반대하여 상퀼로트를 입었는데, 이 의복은 그 이래로 서양식 남자 바지가 되었다. 또 귀족 칭호는 없어지고, "시민"이라는 단어가 상대방에 대한 호칭이 되었다. 가정마다 혁명가들의 흉상들이 비치되었고, 거리명칭은 왕이나 귀족의 이름으로부터 혁명적 사건이나 영웅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1794년 봄 무렵이면 프랑스는 대외전쟁에 있어서나 국내사정에 있어서 안정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공안위원회를 장악한 로베스피에르는 기요틴을 정치적 도구로 삼아 공포정치를 지속시켰다. 그의 일파는 과격한 에베르 일당을 숙청하고, 다시 당통과 그 밖의 분파의 주도자들을 처형하고 독재정치를 확립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미온적인 공화론자들을 숙청하고 모든 시민들이 도덕적으로 깨끗하며 사심 없는 애국자가 되기를 바랐다. 그의 목표는 이상적인 "덕의 공화국"의 수립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로베스피에르의 광신적인 이념에 무관심하였고, 공포정치에 대해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국민공회는 1794년 7월에 로베스피에르의 영도권을 거부하고 그를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5. 총재 정부와 나폴레옹의 쿠데타
로베스피에르를 몰락시킨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프랑스에서는 다시 반동체제가 성립되었고, 혁명은 다시 부르주아 중심으로 돌아갔다. 많은 혐의자들이 석방되고 로베스피에르 시기에 제기된 입법이 파기되었으며, 파리 자치시 정부, 공안위원회 및 혁명재판소는 해체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체제를 이끄는 두 집단은 혁명으로 벼락부자가 된 계층 및 왕정복고를 기피하는 국민공회 의원들이었다.
이제 국민공회가 결정한 정부설치령에 따라서 5명의 총통으로 된 행정부가 구성되고 양원제 입법부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1795년에 집권한 총재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하였다. 국내 경제사정은 악화되고 있었으나, 대외전쟁 중 오스트리아 군과의 교전은 성공적이었다. 특히 이 시기에 군사적인 승리를 통하여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1796년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사르디니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였다. 그리하여 이제 대불동맹국으로서 프랑스에 맞설 수 있는 주요 국기로는 해군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영국만이 남았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공격하는 의미에서 인도로 가는 길목인 이집트를 원정하였다. 그는 대체로 육전에서는 우세를 유지하였으나 나일 해전에서 넬슨의 영국해군에 패배 당하였다. 1799년 나폴레옹은 급히 단신 귀국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정국을 수습하지 못하는 총재정부를 쓰러뜨리고 집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은 사실상 종결되었던 것이다.
<< 참고문헌 >>
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뮨까지 - 1789-1871』. 서울 : 까치, 1985.
모로아, 앙드레. 『프랑스사』. 서울 : 홍성사, 1983.
뒤비, 조르주·망드루, 로베르. 『프랑스 문명사』. 하. 서울 : 까치, 1995.
민석홍 편. 『프랑스사 革命史論』. 서울 : 까치, 1988.
르페브르, G. 『프랑스혁명 - 1789년』. 서울 : 을유문화사, 1995.
쏘불, 알베르. 『프랑스혁명사』. 서울 : 탐구당, 1983.
마띠에, 알베르. 『프랑스革命史』. 상·하. 서울 : 창작과비평사, 1982.
퓌레, 프랑스와. 『프랑스혁명의 해부』. 서울 : 법문사, 1987.
  • 가격1,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2.11.07
  • 저작시기2002.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089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