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에서의 공산주의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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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만주부 연해주부등을 설립 추진해 갔다. 당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책임비서는 조봉암이었다.
1926년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죽은 해이다. 순종의 인산일이 6월 10일로 확정되자 조선공산당은 3·1운동의 경우처럼 대대적 만세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도 우연한 일과 사소한 실수가 겹쳐서 조선공산당의 조직이 발각되고 만다. 6·10 만세운동을 할 때 사용하기 위해 약 5만장의 전단을 인쇄물을 보관하고 있던 집의 가족들과 친밀한 한 여자가 호기심으로 그 가운데 두 장을 꺼내 친구들 사이에 돌려보았다. 마침 경찰이 중국 화폐 위폐범의 집을 수색하였을 때 재떨이에 구겨져 있는 이 전단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단서가 되어 강달영과 그 일파들이 있는 곳이 알려졌고 이들은 체포되었다. 6월 10일의 만세 시위에서는 곳곳에서 '조선공산당 만세,' '조선공산주의 만세' 등의 구호가 터져 나왔으며 160여명의 공산주의자들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강달영은 모진 고문 속에서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몇 번이나 자결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일경이 암호문을 해득해내었을 때 불지 않을 수 없었다. 제2차 조선공산당과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관련자들은 7월 중순 이후 모두 붙잡혔다. 제3차 조선공산당은 김철수를 책임비서로 1926년 9월 출범하여 안광천 책임비서를 거쳐 김준연 책임비서이던 1928년 2월에 검거선풍을 맞이 한다. 화요계 세력이 전멸상태에 빠져 3차당은 종래 공산주의 운동의 통일을 주장하던 세력(화요계, 서울파의 일부, 무파벌 등)과 합동하여 중앙기구를 편성하였다. 이들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당이란 의미의 ML당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3차당은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신간회의 결성에 커다란 노력을 기울였다.
제4차 조선공산당은 1928년 2월 27, 28일 개최한 3차당의 3차 당대회에서 조직되었다. 7월 5일 대량 검거로 종말을 고했다. 4차당은 철도노동자 출신의 차금봉을 책임비서로 하였다.
1928년 7월-8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6차 대회는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몇 가지 결정을 내렸으며 이 결정에 기초해 코민테른 집행 위원회 정치서기국은 같은 해 10월 [조선의 농민과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를 발표하였다. 흔히 10월테제로 불리워지는 이 테제는 이후의 조선공산주의 운동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0월테제]는 조선공산당의 과거의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전략을 설정하고자 하였다. 테제는 과거의 실패의 원인을 조선 공산당의 당원은 거의 지식인과 학생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파벌주의에 빠졌다는 데 찾았다. 그리하여 조선공산당은 산업노동자와 빈농을 시급히 포섭하여야 하며 토지개혁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경주하여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농민혁명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이 테제는 통일전선에 대해서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우선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을 강화하고 쁘띠 부르조아의 민족혁명운동에는 완전한 독자성을 부여해 주며, 그 다음에 모든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과 과감하게 투쟁함으로써 타협적인 민족개량주의와 민족혁명운동을 분리해내면서 민족주의 혁명운동을 성취해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 해소운동을 벌이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28년 12월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취소하였다. 파벌 청산과 노동자 빈동에 기초한 당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고 해외조직이었던 만주총국과 일본총국도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원칙에 따라 차례로 해체 선언을 하였다.
그후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는 공산당을 재건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대표적 사례로 박헌영의 [경성콤그룹]을 들 수 있다. 박헌영은 1900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초기부터 참여하였으며 일제의 탄압과 고난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흔들림 없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12차 조선공산당 사건과 관련해 재판을 받던 가운데 안경을 집어던지기도 하고 인분을 먹기도 하는 등 미친 척함으로써 병보석으로 풀려나자 러시아로 잠적하였다가 상해로 돌아와 조봉암 및 김단야와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였고 1939년 석방되자 리관술 김삼룡 정태식 리현상 등과 더불어 [경성콤그룹]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 역시 1941년 붕괴되어 박헌영을 제외한 전원이 체포되었다. 박헌영은 전라도 광주의 한 벽돌공장의 노동자로서 은신해 있다가 해방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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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1.21
  • 저작시기2002.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2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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