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전환기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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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8. 여말선초의 사회변동과 조선 건국

9. 조선 태종연간의 제문제

10.사림파와 훈구파의 각축

11.인조 반정의 제문제

12.영조, 정조와 탕평정치

13.대한제국시기의 제문제

14.해방 전후 시기의 제문제

본문내용

유지를 통한 총독부와 일본인의 인명 및 재산 보호, 여운형의 의도는 정권 인수 / 정치범과 경제범 석방, 치안유지 및 건국을 위한 활동에 총독부의 간섭 배제, 청년, 학생, 근로자, 농민 등을 조직 훈련하는 데 간섭 배제의 약속을 받아냄.
8월 16일 안재홍은 경성방송국을 통해 이 사실을 방송. 그러나 이날 조선총독부는 행정권 이양을 거부 - 미국으로부터 미군 이외의 어떠한 세력에게도 행정권을 넘겨줘서는 안된다는, 미군이 직접 인수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은 때문. 총독부측이 경찰서 신문사 학교 등을 다시 접수 - 건준 좌절의 직접적인 원인.
이에 따라 각 정치세력이 '삼인일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많은 정당, 정치단체를 만들기에 이름.
9월 6일 미군이 서울에 진주, 9월 9일에 아베 총독과 항복 조인을 체결.
3) 신탁통치와 미소공동위 문제
해방 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사실상 미군정이 정부로서 기능하기 시작. 아울러서 임시 분계선이던 38선이 차츰 현실적인 국경으로 변하기 시작.
얄타협정에 따라 소련군이 일본과의 전투를 시작 - 미국의 요구에 따른 것. 관동군은 사기를 상실하고 쉽게 무너져, 8월 11일에 이미 소련군이 함경북도 지역에 진주하기 시작, 12일에는 나진, 13일에는 청진까지 남하. 이에 다급해진 미군측에서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활동지역 구분을 위한 선으로서 38도선을 제시(딘 러스크와 본 스틸웰 두 대령). 소련에서 이를 수락. 이러한 양국의 책략이 남북분단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 두 나라 다 무장해제에서 그치지 않고 자기 국가에 이익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
미군의 태도는 단순히 무장해제 차원이 아니라 '점령군'이었으며, 명실상부한 군정 즉 군사정부로서 행동. 이것이 38선이 고정되는 중요한 원인. 그렇지만 이를 극복하기 보다는 이러한 미국, 소련의 태도를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한 세력이 있었고, 그 술수에 말려들어간 국민들이 근본적인 문제.
패전국으로서 5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던 오스트리아의 사례.
미군정의 또 다른 문제 - 미국의 문화가 우리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 특히 교육의 경우 이때부터 미국식 교육제도(실용주의 교육)이 정착. 일제 식민지시기에 단절된 전통문화가 이 시기에 또한 심각한 타격을 받으면서 단절의 골이 더 깊어지게 되었다. 소도 - 사찰 - 서원 - 교회? 아무튼 우후죽순처럼 교회가 생겨나기 시작. 교회 첨탑 위의 피뢰침. 우리 나라 교회는 지역사회와 관계가 없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
이러한 미군정에 대해 임시정부측은 미국의 승인을 요구하였으나 결국 개인 자격으로 입국, 임시정부로서의 기득권을 행사할 수 없었음. 좌익 쪽에서는 급히 조선인민공화국을 만들었으나, 역시 불법단체로 활동한 상황
건준의 좌절에 이어 임정의 해체가 이어지는 과정의 문제 - 미국의 방침이 기본적으로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여기에 국내세력이 미군정에 대해 책동한 것이 더해짐.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협성중앙협의회(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확대),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등 동아일보계열(지주 자본가)의 한국민주당,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심이 된 한국독립당 등이 대표적 우익 정치단쳬
임시정부 부주석이었던 김규식이 중심이 된 민족자주연맹, 여운형이 중심이 된 조선인민당 등이 중도적 정치단체
박헌영 등이 재건한 조선공산당, 되에 이를 남조선신민당, 근로인민당과 합쳐서 만든 남조선노동당이 좌익 정치단체
이러한 상황에서 처음에는 우익 전반이 임정을 중심으로 활동할 것을 희망했으나, 이승만 한민당 계열에서 부추겨 미군정에 의해 해체됨.
정치적 구심점이 완전히 사라진 상황에서 수많은 정치단체, 정당이 각각 주도권을 쥐고자 활동하게 됨.
이로부터 누가 미국의 현실적 이익과 관련된 대한정책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따를 것인가, 친일파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등이 관련되면서 미군정의 비호를 받는가에 따라 남한 정권 담당자가 결정되기에 이르렀음 - 그 승리자가 결국 이승만이었던 것.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신탁통치 문제를 절묘하게 이용.
신탁통치는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내에 적어도 자국에게 불리한 정권을 만들지는 않겠다는 의도에서 생각해낸 것 - 당초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제안.
1945년 1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내용 - 미국은 미 소 영 중 4대국의 5년 신탁통치, 필요하면 5년연장안을 제시 / 소련은 한국민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과 이를 4대국이 후견하는 방식을 제안, 소련안을 중심으로 타협.
이를 동아일보에서 왜곡 보도 - 소련이 38선 분할점령을 구실로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 미군의 검열을 통과한 보도라는 데에 의문점이 있는 사건
처음에는 좌, 우익 모두 반탁, 실상이 파악되면서 좌익에서 찬탁으로 돌아섬.
좌익은 찬탁 -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판단(당시 전농, 전평:노동자단체 등은 모두 사회주의 성향이었음) / 우익은 반탁 - 좌익과 함께 임시정부를 구성한 경우 주도권을 쥘 수 없다는 판단
반탁운동이 거세게 진행되는 가운데 1946년 봄의 미소공위(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정당과 사회단체 선정이 안건)가 결렬 - 소련은 반탁 세력은 배제하자고 주장, 미국에서 이를 거부 / 6월 3일 이승만이 '정읍 발언'으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 / 이미 전부터 미 국무부가 단독정부 수립 추진, 이승관 정권 승인이라는 보도가 나돌던 상태.
이러한 상황에서 추진된 것이 좌우합작운동(김규식, 여운형, 김구) - 대부분의 좌우익에서 비판
1947년 봄의 미소공위도 좌절된 뒤 결국 한국 문제는 UN으로 넘겨지고 단정반대운동이 일부 있었으나 결국 선거에 의해 이승만정권 탄생. 1948년 2월 유엔에서 '가능한 지역만에서의 총선거'안을 가결, 8월 15일 정부 수립.
북한 정권은 이보다 뒤늦게 9월 9일에 정부를 수립. 그렇지만 1946년에 토지개혁을 실시한 바 있고, 1947년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이어서 조선 인민군을 창설하고 1948년 4월에 헌법을 채택. 따라서 이미 역시 단독정부 수립의 길을 걸어왔음을 알 수 있다.
세계적 냉전질서와 분단 고착화 문제,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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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1.12
  • 저작시기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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