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인비의 문명사관의 특징과 그리스로마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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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 1 절 토인비 사관의 특징
2. 싸이클 이론(단계의 비교)
3. 문명과 문명의 만남

본문내용

에 비해 월등히 우월하고 모든 민족을 정복한 민족을 낳았으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유럽은 세계의 3분의 1이 아니라 반’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로마인’의 이상적 초상과 대조적인 모습으로 비쳐진 ‘야만인’들은 하나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제공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Ammianus Marcellinus. 330~395년경, 로마의 역사가, 로마 제국 말기의 역사를 기록한 저서 『사건 연대기』에서 훈 족(370년 경 유럽 남동부를 침략해 이후 140여 년 동안 유럽 남동부와 중부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유목 민족)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기록을 남겼다.
가 우리에게 남겨준 공포와 부정확함으로 가득 찬 훈 족에 대한 기괴한 그림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바로 이 ‘야만 족속들’은 어느 정도 로마인들에 의해 발명되었던 것이다. 즉 실제로 그들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인종적 단일성과 지역적 정착과 같은 몇몇 특징이 이들의 속성으로 주어졌다.
로마인들이 알게 된 최초의 유럽 ‘야민인’들은 켈트 족이었다. 켈트족은 유럽 서쪽 끝의 골 족에서부터 소아시아의 갈라타아인들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은 민족 집단을 일컫는 것이었다. 이들간의 문화적 유사함이 얼마만큼 현실을 만영한 것인지 아니면 로마인들의 편견에 기인한 것인지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유럽의 두 번째 야만인 대집단은 게르만인들이었다. 로마인들은 이들을 모두 같은 사람들로 보았고 ‘하나의 순수한 인종’으로 생각했다. 타키투스는 이들에 대해 ‘그들은 모두 신체적 특징이 같다. 즉 사납고 푸른 눈, 붉은색 머리카락, 건강한 체구, 그리고 단지 충동에만 적합한 사람들로 노동과 고생은 그리 잘 견디어내지 못한다’라고 적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잘 알지 못하는 낯선 것에 대해 로마인들이 습관적으로 갖고 있던 근시의 반영에 다름 아니다.
다른 한편 야만인들에 의한 서로마 제국의 정복을 하나의 결정적 단절로 제시하는 오래된 상투적 설명도 계속 유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들 야만인들과 제국의 관계가 항상 대립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국경을 넘는 대부분의 야만인은 침략자가 아니라 황제에게 복무하는 병사로서 허가를 받아 제국 경내에 정착한 이민자로 들어왔다. 이들은 기존의 정치-행정 구조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지키는 데 관심을 가졌다.
서로마에 관한 최근의 한 연구는 실제로 5세기에 일어난 일은 로마의 통치가 제국 영내에 아무튼 합법적 방법으로 정주한 일부 야만인들의 통치로 대체된 것일 뿐 결코 제국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단지 변형을 의미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서로마 제국의 붕괴를 이해하려면 야만인들이 제국을 지배하기 훨씬 전부터 중앙 행정 조직의 마비와 함께 제국을 약화시켜온 사회적 분열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공적 기능의 점진적 사유화, 경제적 불평등의 증가, 그리고 그에 따라 대토지를 소유한 대부호 계층의 공고화가 나타났으며, 채무로부터 도피하여 유력자의 보호 하에 들어간 콜로누스(소작농)의 등장, 노예제의 쇠퇴와 함께 대지주들의 토지에의 예속화 과정 등이 그것이다.
그러면 제국을 멸망시켰다고 일컬어지는 ‘야만인’들은 누구였는가?
러시아의 역사가 로스토프체프는 로마는 농민 대중을 ‘문명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층 사람들의 문화가 농민 문화에 굴복하고 말았기 때문에 스러졌다고 말한다. 먼저 “농촌의 야만이 도시민들을 침몰시키기 시작했고”, 그리고 나서 이들 도시민들은 “외부로부터의 침투 혹은 정복을 통해 들어온 야만적 요소들의 도래에 의해 완전히 질식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제국을 멸망시킨 적들은 외부적인 것만큼이나 내부적인 요소들, 즉 로마화하지 못한 농민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모든 점은 ‘야만인’ 개념이 아주 불확실하다는 점과 함께 ‘제국의 몰락’에 대한 틀에 박힌 견해가 왜 그토록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는지도 함께 설명해 준다. 로마가 야만인들의 쇄도를 저지하지 못한 지배 계급의 실패로 붕괴되었다는 전통적 이미지는 지금까지 매우 유용한 교훈적 기능을 수행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수행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지식인과 정치가들은 우리 사회가 대중이라는 야만인들로부터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본다. 우리 자신의 현실적 문제와 직접 대면하고 싶지 않는 그들로서는 로마의 몰락이라는 케케묵은 허수아비를 다시 내세우는 것이 빈부 격차의 증가 혹은 자유의 제한 등과 같은 분열을 야기하게 될 내적 요인들을 분석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로마 사회의 내적인 문제를 강조하는 해석에서는 제국의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야만인들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 견해의 지지자들은 카바피의 한 시에서 황제와 원로원 의원들이 읊조린 다음과 같은 구절을 그들 스스로에게 적용할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야만인들의 도착을 헛되이 기다리다가 이제 어느 곳에서도 그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슬퍼하면서 되돌아서는 이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이제 야만인들 없이 우리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친구들이 문제의 해결책이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Ⅲ.
조셉 폰타나는 「야만의 거울」을 통해 그 동안 주된 흐름으로 받아들여졌던 ‘우월한 유럽의 출발점’으로서의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뒤집어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시각을 제시해 주었다. 즉 ‘야만인’이라는 타자에 비춰 자신들을 보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그리스인’, ‘로마인’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이 ‘야만의 거울 깨뜨리는’ 역사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폰타나는 이러한 ‘깨뜨리는 작업’, 그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즉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하나의 단일한 개념을 보다 광범한 틀을 가진 관점으로 대체하는 것, 많은 공통된 요소를 갖는 문화 개념으로 대체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선적 견해를 무너뜨리고 ‘다원적 역사’를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일그러진 거울에 보이는 피상을 보기보다는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내재적 요소들을 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이 가능할 때, 우리 시대에 더 이상 ‘야만인’이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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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6.03
  • 저작시기2003.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3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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