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부족국가의 행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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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부족국가의 형성과정
1. 구석기시대
2. 신석기시대
3. 청동기시대
4. 금속기혁명과 부족국가의 대두

Ⅲ. 고조선의 행정
1. 고조선의 역사적 상황과 단군신화 속에 나타난 행정
2. 고조선의 행정환경
3. 고조선의 행정

Ⅳ. 부여의 행정
1. 부여의 역사적 상황과 행정환경
2. 왕과 가(加)
3. 사출도(四出道)
4. 법치

Ⅴ. 옥저·동예의 행정

Ⅵ. 삼한지역의 행정

Ⅶ. 한사군(漢四郡)의 행정

Ⅷ. 결론

본문내용

국은 만여가(家), 소국은 수천가(家)로 총 10여만 호였는데, 진왕(辰王)이 목지국(目支國)을 다스렸지만 제국(諸國)에도 각각 장사(長師)가 있어 큰 것은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 하였다. 또한 변진한은 모두 24개국으로서 대국은 1,5천가, 소국은 6,7백가(家)로 총 4,5만 호였는데, 이들 국에는 각각 거사가 있어 세력이 큰 것은 신지라 하고 작은 것은 차례로 험측·살해·읍차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여기에 장사 또는 거사에 의하여 다스려졌다는 70여개 국(國)이 바로 독립적인 군장사회이다. 다만 목지국의 군장이 진왕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삼한이 군장사회에서 점차 국가단계로 넘어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장동희, 전게서, 66~67면
목지국 외에도 백제국(百濟國)·사로국(斯盧國)·구사국(狗邪國) 등이 삼한지역의 중심세력으로 대두하고 있었다.
마한·진한·변한 등의 삼한은 중심세력에 의한 연맹체의 구별로 보인다. 즉, 마한은 목지국의 진왕이 맹주(盟主)가 되었고, 진한은 사로국, 변한은 본(金官)가야가 중심세력이었던 연맹체의 단계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백제국이 마한을 정복하고, 사로국이 이웃의 여러 소국을 병합하여 초기국가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삼한에서는 정치적 군장의 세력이 커지자, 그 전부터 있던 제사장인 천군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제정이 분리되게 되었다.
Ⅶ. 한사군(漢四郡)의 행정
한사군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漢武帝)에 의해서 설치된 군현으로서 400여년간의 중국식민지시대라고 볼 수 있다. 한사군시대는 요랑시대(樂浪時代)로 대표되는 것이며, 그 문화를 요랑문화라고 부른다.
요랑문화는 한문화이지만 4세기간이나 존속하였기 때문에 그에 따라 많은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 장동희, 전게서, p.68
1) 정치적인 면
중국의 정치적 분열책으로 민족국가 흥기를 저지시킨 바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외족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우리 민족의 각성과 한족에 대한 반항의식을 고취시켜 민족의미를 일깨워 주었으며, 또한 중국정치제도의 영향으로 고대국가의 형성에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2) 경제적인 면
철기의 광범한 사용으로 농업이 급격히 발달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경제적·사회적 계급의 격차를 확대시켰다.
3) 사회적인 면
한문화의 영향으로 한민족의 습속(習俗)이 유행되어 민족고유의 미풍양속이 타락되었으며, 공동체적인 유대가 깨어지면서 법속(法俗)이 복잡해져 8조가 60여조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속에서 원시적 토착사회보다 발전되어 갔다.
4) 문화적인 면
한자의 전래는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학술·공예 등의 전반적인 문화에 큰 발전의 기틀을 마련해 준바 있다.
요랑문화는 종래 그 영향을 대단히 크게 강조하여 왔으나 요랑 그 자체가 커다란 국가가 아니라 대동강유역의 조그만 조계(租界)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그 의의를 지나치게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야금술(冶金術)을 비롯하여 제염술(製鹽術), 그리고 도작농업을 갖다 주었다는 데 더욱 커다란 의의가 있다
한사군의 관제는 군현으로 조직되었는데, 군은 지금의 도(道)에 현은 지금의 군에 해당하며, 각 군에는 여러 속현(屬縣)이 있었다.
군에는 태수(太守)와 승(丞)을 두되, 변군(邊郡)에 병마(兵馬)를 맡은 장사(長史)를 두었으며, 대군(大郡)에는 태수 밑에 수개의 속현을 다스리는 도위관(都尉官)을 두었다. 또한 현은 대현(만호이상)과 소현(만호이하)으로 구분되어, 대현에는 령(令), 소현에는 장(長)을 두고 그 밑에 승(承)·위(尉) 등의 관직을 두었으며, 향직(鄕職)으로는 삼로가 있었다.
군 위에는 군을 통할하는 주자사(州刺使)가 있었는데, 한사군은 요동·요서 등의 제군(諸郡)과 같이 북경에 있는 유쥬자사(幽州刺使)에 속하였다.
이와 같이 한사군의 관제는 중국의 관제를 그대로 적용하였으며, 군·현의 중요한 관리들도 대개 중앙정부로부터 직접 임명·파견되었다.
Ⅷ. 결론
인류의 문화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문화의 단계로 계기적인 발전과정을 경유하였다. 우리 나라 역시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고대 부족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국가 형태의 시작은 단군에 의한 고조선 건국시기부터로 고조선은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정치적 사회를 형성한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이다.
청동기 문화의 발전은 씨족간 통합을 유발했고 아울러 성읍형태의 국가를 만들어 냈다. 고대부족국가는 씨족생활→포족생활→성읍국가→연합국가→통일국가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대강국으로 성장해 갔다.
부족국가로 성장해 감에 따라 기존에 부족장보다는 더 큰 영향력을 지닌 존재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러한 요청에 따라 왕과 대부족장들이 정치세력의 등장하게 되었다.
행정은 근본적으로 정치세력의 영향을 받게되는데 왕과 대부족장들의 국가의사 창조와 결정 및 그 행사를 둘러싼 활동과 지배·복종관계로서의 강제적 사회통제작용 등이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귀족들을 중심으로 고대부족국가에는 정부조직이 생성되기 시작하였다.
부족연맹시대에는 여러 관직명을 사용하나, 부족적 성격은 전혀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관제라고 하기보다는 부족적 지배 체제에 관직명을 붙여 권위를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였다고 하나 부여에는 8만여호가 정착되어 있었고 행정기구는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 선거에 의한 왕 아래 우가·마가·저가·구가 등 가축의 이름을 딴 관직의 보좌를 받는 중앙정치 구조가 성립되었다.
또한 부족국가시대에는 의미는 다를 수 있지만 중앙집권체제에는 달하지 못하였어도 지방분권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보여진다.
비록 고대부족국가의 행정이 지금에 행정에 비하면 비민주적이고 초라하기는 하지만 지금의 행정이 있기까지의 변화의 과정을 생각하면 행정은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며 국가조직의 유기적인 활동과 국가안녕을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유종해·김문성, 행정사의 이해, 대영문화사, 2003
유종해·류영옥, 신고 한국행정사, 대영문화사, 1990
이대희 외, 한국의 행정사, 대영문화사, 2001
장동희, 한국행정사, 법문사, 1991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Ⅰ, 경세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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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05
  • 저작시기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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