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의 원시부족국가 형성과 그 생산력에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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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본론
ⅰ고조선
1. 경제수준
2. 농업과 목축업
3. 수공업과 상업
4. 경제의 생산 담당자
ⅱ. 예맥
ⅲ. 부여
ⅳ. 읍루
ⅴ. 고구려
1. 정치제도
2. 경제/사회제도
3. 풍속
ⅵ. 옥저
ⅶ. 동예
ⅷ. 삼한
1. 통치제도
2. 경제
3. 생활양식 및 풍습

Ⅲ. 결 론

본문내용

른 읍락민이 구역 내로 침범하면 곧바로 소 ·말을 물리는 책화를 하거나 생구가 되어야 했다. 이것은 읍락 내부에 아직도 공동체 단위의 생활이 주로 영위됨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따라 동예지역에서는 강력한 대군장이 출현하지 못하고, 단지 후(侯) ·읍군(邑君) ·삼노(三老)가 각 읍락을 다스렸다.
일찍부터 낙랑군은 옥저와 동예지역에 7개현을 설치하여 간접 통치하였는데, 이들 명칭은 그들이 각 읍락의 거수에게 하사한 것이다. 현후는 낙랑군 관리의 명칭을 빌어 휘하의 관리를 공조 ·주부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2세기 후반 이후 동예는 고구려 지배 하에 있다가, 245년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낙랑군의 공격을 받고 다시 그 지배 하에 들어갔다. 동예의 세력 가운데 가장 큰 불내예후는 위나라가 침입하자 투항하였고, 247년에는 위나라에 조공을 바쳐 불내예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거처는 읍락민 사이에 섞여 있어 뚜렷이 구분되지 못할 정도로, 여전히 통치력이 미약하였다. 313년 낙랑군이 멸망된 뒤부터 다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광개토대왕 대에 대부분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농업을 주로 하였으며, 마포와 양잠 기술이 발달하였고, 풀솜(명주)을 만들기도 하였다. 동예인은 별자리를 관찰하여 그해 농사의 풍흉을 예고하였고, 매년 10월에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밤낮으로 음식과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제천행사를 행하였는데,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특산물로는 반어피 ·표범가죽 ·과하마 ·단궁 등이 알려졌다.
ⅷ. 삼한
삼한이란 기본적으로 마한, 변한, 진한을 총칭하며 기원전 2세기 경부터 기원후 3세기 경까지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있던 정치집단을 뜻한다. 한국민족 형성과정에서 문헌상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구성종족의 명칭은 예, 맥, 한(韓)족으로 집약된다. 이 가운데 예, 맥족은 동북만주, 요하유역, 한반도 북부일대에 분포하여 고조선,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 등으로 불리는 여러 정치세력 집단을 구성하였으며, 한족(韓族)은 한반도 중남부지역에서 마한, 변한, 진한으로 대표되는 정치집단을 구성한 것으로 이해된다.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당시 삼한과 함께 한반도 북으로는 고구려가 서북지역에는 낙랑군등의 중국의 군현이 존재했고 동북지역에는 동예, 옥저와 같은 정치집단이 있었다고 하였다.
1. 통치제도
삼한 소국들의 사회체제는 아직도 금석병용기로 부족공동체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소위 대국이라야 여러 부족의 연맹체에 불과하였으며 정치와 제사는 분리된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위지》변진조에 보면 격이 높은 것부터 열거하여 신지 ·험측 ·번예 ·살해 ·읍차 등의 군장의 칭호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삼한 전체에 공통된 것이었고 격의 차이는 있으나 이들은 모두 한 부족국가의 우두머리에 대한 칭호였다. 각 부족국가는 이들 우두머리가 통솔하였으나 아직 도시와 촌락의 구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을은 미분화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부락 단위 공동체적 조직은 매우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2. 경제
농업과 양잠 ·길쌈 등이 삼한을 통하여 널리 행하여졌다. 특히 평야가 많은 삼한지역에는 벼농사가 일찍부터 행하여졌고 수리시설로 저수지도 많이 만들었던 것 갈다. 그 한 예로 김제의 벽골지, 밀양의 수산제, 제천의 의림제 등은 이 때의 저수지이다. 목축도 성했고 해안지대에는 어업도 성하였다. 특히 진한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산출되어 널리 쓰였다. 철은 물품매매에 화폐처럼 사용되고 낙랑 방면과 일본에까지 수출하였다고 한다.
3. 생활양식 및 풍습
삼한시대에는 농업이 그들 경제의 최대 근본이었으므로 씨를 뿌리는 봄과 추수하는 가을에는 계절적인 제사가 성행하였다. 씨를 뿌리고 난 5월에는 부락 전체의 군중이 모여 신에게 제사하고 가무와 음주로 밤낮을 즐겁게 놀았고 추수가 끝난 10월에도 그러하였다.
집은 대개 평지에 움집, 산지에는 귀틀집이 많았는데, 의복은 삼베·모시·명주 등으로 만들어 입었다. 남자는 도포처럼 된 웃옷을 입고 상투를 틀고 가죽신 또는 짚신을 신었으며 이때부터 지게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구슬을 재보로 삼았고, 또 그것을 치레로 옷에 달기도 하였으며 귀고리와 목걸이도 사용하였다. 이러한 유물은 지금도 당시의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진한·변한에서는 길 가던 사람들이 서로 길을 사양하였다 하니 풍속의 순후함을 말해 주고 있으며 혼인 등 예절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었고 법과 형벌은 일반적으로 엄하였다. 자연환경이 온화하고 곡식이 풍부하여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노래·춤·음주가 성행하였으며 특히 변한·마한 지역에는 비파와 같은 악기도 있었다고 한다.
Ⅲ. 결 론
원시부족국가로 고문헌에 나타나는 국가는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 예맥, 마한, 진한, 변한등이 있다. 그러나 읍루, 옥저, 예맥은 다른 국가와는 달리 그 발전도가 낮았다. 그 이유는 이 종족들이 주로 채집, 어로 등에 종사하였고 일부는 농업에 종사하였다. 또한 오랫동안 외부의 금속문화의 접촉이 없어 그들이 사용한 도구는 타 국가에 비하여 원시적인 것이였다. 또한 이들국가는 일찍부터 타종족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성장이 지연되고 있었다
부족국가는 부족공동체의 최고의 단계이며, 원시사회의 최후의 단계이다. 원시사회말기에 형성된 부족국가로는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 예맥, 마한, 진한, 변한 등이 성립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는 중국의 고문에 자세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일제시기 일본인 학자들은 삼국지의 사회적 가치를 더 인정하면서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므로 소국이 삼국(부족국가)으로 발전하는 역사단계를 설정하기 어렵다. 반면에 한국인 학자들은 삼국에 선행한 소국을 고전적인 국가 기원론에 입각하여 원시부족국가로 규정해 삼국형성이 갖는 역사적 계기성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1. 한국사 - 한길사 지음, 한길사 펴냄
2. 한국문화사 - 이민식,이지원 지음, 혜안 펴냄
3. 한국사의 이해 - 조항래 지음, 아세아문화사 펴냄
4. 한국사 신론 - 이기백 지음, 일조각 펴냄
5. 국가론 - 최학유 지음, 세종출판사 펴냄

키워드

고조선,   예맥,   부여,   읍루,   고구려,   정치제도,   삼한,   경제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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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11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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