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국가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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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대국가의 신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단군신화

2. 부여의 건국신화

3. 영웅설화

4. 고대국가의 발전과정

5. 광개토왕의정복사업

6. 국가 체제의 정비와 전투력

7. 삼국 및 고구려의 대외관계

8. 4-6세기조공-책봉 관계의 실상

9. 6세기 중반 이후의 정세변동

10. 수.당의 집요한 고구려 공격의 배경

11. 임나일본부설을 통해 만들어진 일본인들의 고대사상

본문내용

용병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역사상(한국측)의 대립이기도 함.
문제의 문구 :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渡海'의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인가? ①倭가 건너와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였고, 이곳을 근거로 하여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는 등 한반도에서 정치·군사 활동을 하였다. 정복의 주체는 왜 혹은 이를 파견했던 大和정권. 이러한 설을 결산한 『임나흥망사』(말송보화)의 요점은 왜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역에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년 동안 임나일본부를 두고 이를 지배하였다는 것.(일본) ② 이 비문의 목적은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므로, 이 문장의 전체 주어 역시 광개토왕이 백제, 왜, 신라 등을 물리치고 전통적인 대외관계를 복구했다는 것. 정인보는 문장의 주어를 여러 차례 바꾸면서 다소 무리한 해석을 한 듯이 보이지만, 어쨌든 渡海와 破의 주체를 고구려로 보아야 한다며 일본인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 고구려가 한반도에 건너온 왜를 바다를 건너 물리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이 때의 왜는 백제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끌어들인 용병 정도에 불과함. 이 부분뿐만 아니라, 비문에서는 고구려와 구원舊怨이 있는 백제에 대한 토벌이 가장 강조되고 있으며, 아울러 백제가 끌어들인 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토벌하는 모습을 보임. (개인적으로 비문 전체의 맥락을 보면 이 당시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주적은 백제였고, 왜는 항상 백제와 연관된 세력으로 인식되는 정도인 것으로 보임. 따라서 이 문장의 주체를 왜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닌가 생각함.) ③ 倭·渡海·破 등의 글자는 일본군 참모부가 조작한 것.(이진희) 비록 이러한 해석은 약간 무리인 듯 하지만, 어쨌든 일본군부가 한국 고대사에서 일본의 대륙진출 사실에 주목하고, 이 곳에 등장하는 倭를 임나일본부와 연결시켜 해석함으로써 일본측 해석의 틀을 제공하였다는 점, 즉 비문 해석의 정치적 의도를 선도한 것을 지적한 것은 중요함. ④ ①과 해석은 같으나, 이는 고구려가 왜라는 침입자와 그에 의해 신민의 지위로까지 떨어질 뻔한 백제와 신라를 구원해 주었다는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왜의 위협을 과장한 것이라고 봄. (이성시, 이종욱)
어쨌든 광개토왕비문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 시기 백제와 가야와 왜는 상호 연관 아래 움직이고 있으며, 이에 대해 고구려는 신라를 구원하여 대적하였고, 그 결과 百殘과 왜를 물리쳤다는 내용임. 그 전쟁의 장소는 백제와 신라의 영토 안에서부터 김해의 임나가라 부근까지였는데, 백제의 사주를 받고 임나가라의 지원을 받아 신라를 침략하던 왜군이, 신라가 구원을 요청한 고구려에 의해 패퇴하였고, 임나가라의 성들도 함락되어 고구려 순라병들이 지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문에서 대립의 주체는 고구려와 백제 -특히 百殘이라고 표현되고 있듯 선대인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음- 이며, 왜는 백제가 끌어들인 용병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임나일본부'라는 용어 자체도 문제. 광개토왕 비문에는 '왜'와 '임나가라'라는 용어는 등장해도,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음. '일본'이라는 국호는 645년의 大化 개신 이래 추구되어 온 고대국가 수립의 노력의 결과 689년에 중국을 의식하면서 공식화된 것으로서, 그 이전에는 '왜'라고 불러야 마땅함. 720년에 쓰여진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광개토왕 비문에 나오는 '왜'의 근거지로 연결시키는 것은 명백한 잘못. 다만 이 시기에는 왜와 한반도 남부의 교류는 활발하였고, 교류를 위한 倭館은 필요했을 것이고, 『일본서기』에도 '在安羅諸倭臣'이라는 표현이 나오므로, 이를 '安羅倭臣館' 정도로 부르는 것이 옳겠다. 이는 단순한 용어문제가 아님. '왜'와 '일본'은 정치적 통합의 수준이 다를 뿐 아니라, 日本府라고 했을 때는 이 곳을 일본의 행정구역의 일부라고 파악하는 것. (전통적으로 주·부는 군·현을 통솔하는 상위 행정구역임.) 즉 임나일본부는 한반도의 임나가야 지역에 설치한 일본의 행정구역이 되는 것. 그러나 이 시기 이 용어는 성립할 수 없으며, 왜인들의 근거지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倭館 혹은 商館에 지나지 않았을 것.
* 임나일본부설을 통해 만들어진 일본인들의 고대사상.
임나일본부설은 『삼국지』 韓傳에 근거한 1-3세기 고대사상과 긴밀히 연관. 즉 3세기의 한반도 남부의 정치발전 수준에서 보았을 때 백제는 마한의 50여 소국 가운데 하나인 백제국, 신라는 진한의 12 소국 가운데 하나인 사로국에 불과할 정도의 발전 수준을 보이며, 한반도 북부는 한나라의 군현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 4세기 무렵 선진 지역인 고구려는 한군현의 영향을 받으며 일찍이 고대국가를 형성할 만큼 성장하지만, 후진 지역인 한반도 남부는 신라·백제·가야의 미성숙으로 인해 임나일본부의 지배가 가능하다는 논리. 일본학계는 기본적으로 1-3세기는 『삼국지』왜인전, 4-5세기는 신묘년조 해석에 기반한 광개토왕비문, 5세기는 『宋書』倭國傳(당시의 倭王이 남조의 宋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임나·가야·진한·모한에 대한 군사적인 지배를 인정해 달라고 청해 安東大將軍의 작호를 얻는 기록) 을 결정적인 사료로 하여 고대사 구성. 이러한 역사상에서 벗어나는 자료는 '합리'적 문헌비판에 의해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봄. 『삼국사기』의 초기기사가 대표적인 것. 그러나 결코 이 시기 삼국의 발전 정도를 일본보다 뒤떨어지거나 대등한 것으로 볼 수는 없음. 실제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는 1-3세기 무렵 삼국이 주변의 소국들을 병합하는 사실들이 무수하게 등장하며, 더구나 이들 삼국을 건국한 집단들은 모두 고조선의 후예들로서, 구체적으로 부여계통(고구려·백제) 혹은 위만조선 계통(신라)이라고 전할만큼 고조선 이래 국가발달을 경험했던 세력들임. 이들이 건설하는 국가는 비록 소국에서 출발한다고 할지라도 그 통합의 수준이 백지상태에서 출발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를 것.(예, 영국인이 아메리카에 이주하여 만드는 국가의 수준은 백지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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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5.02
  • 저작시기2004.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8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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