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의 전개과정과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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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4/19의 배경
1) 경제적 원인
2) 정치적 원인

2. 자유당 정권의 성격
1) 이승만체제: 출발부터 문제
2) 정통성·유효성을 결여한 자유당 체제
3) 사회적 변화 요구에 대해 강압력으로만 대처

3. 4/19의 전개과정
1) 2/28학생 시위에서 이승만 하야까지의 과정
2) 이승만 하야에서 7/29 총선까지의 과정
3) 7·29 총선에서 5/16 이전까지의 과정

4. 4/19의 참여계층 분석
1) 민주당
2) 여론형성층-도시의 중간층, 쁘띠부르주아, 인텔리층
3) 도시의 실업자, 反프롤레타리아, 하층민
4) 학생

5. 4/19혁명의 한계

6. 4/19혁명의 의미와 평가
1) 4/19는 실패한 혁명인가?
2) 4/19혁명의 의미
3) 민중혁명인 4/19

7. 참고문헌

본문내용

문이다. 혁명이란 기존의 정권을 무너트리는 것이 아니라 혁명를 일으킨 동기와 그 이상들이 사회변혁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 더 나아가 혁명의 본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혁명후 많은 사회적 혼란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공화정이 들어 서는 등 혁명이후 많은 변혁을 겪으면서 나폴레옹의 군주제로 들어섰지만 시민들의 힘으로 이를 물리쳐 자유, 인권과 박애를 기치로 내건 오늘날의 프랑스가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혁명에 비추어 4·19를 평가하면 4·19이후 우리사회도 많은 변화와 굴곡을 겪게 되는데 이것은 혁명이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단, 그 혁명의 이상이 사회에 반영되었는가? 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성공과 실패 또는 미완이라고 말하는 화자들이 있다. 이런 평가를 내리는 것은 개인의 가치관 저마다 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4·19는 80년 광주 민중항쟁과 87년 6월 민주화 선언을 이끌어 낸 모델로 4·19를 꼽는다. 아직도 4·19는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안세력의 부재와 舊 보수정당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더라도 일단에 있어서는 부정한 정권을 타도했고 그 뒤의 민중혁명의 초석이 된 사례로 보았을 때 이는 4·19혁명은 진행형이고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미완의 혁명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로 실패한 혁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 4·19혁명의 의미
첫째, 4·19는 꿈을 상실하고 감각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학생이라는 오명을 씻고 민주세력의 최선봉이라는 자각과 학생운동의 적극적 가치를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4·19민중항쟁은 자유와 민주주의 민권을 쟁취하려는 민주주의 운동의 시초라 할 수 있다. 3·1운동이 민족주의 운동의 성격을 제일의 의의로 삼았다면 4·19는 민주주의적 성격이 일차적 성격이다. 따라서 민주적 시민운동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셋째, 4·19를 통해서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다른 나라의 운명을 대신 개척해 줄 수 없으며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가 개척해야 한다는 민족주체의식이 발현되었다.
넷째, 결의를 다진 반독재 민중의 대열은 팟쇼 독재의 어떠한 혹독한 탄압, 학살, 처형도 물리치고 궁극적 승리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혁명은 정열만이 아니라 논리를 가쳐야 하며 논리가 결여될 때에는 혁명으로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교훈으로 남겨주었다.
비록, 4·19는 학생이 중심이 되어 이룩한 시민혁명의 성격을 띠기는 하였지만 학생만의 것은 아니었다. 4·19에 이르기까지의 언론투쟁은 참으로 눈부신 바가 있었으며 지식인 , 근로자, 농민, 야당 등 광범위한 민주적 역량의 결속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따라서 민주세력의 광범한 전선적 결속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계층간의 이해 관계가 반독재에서는 일치한다는 것을 실증해 주는 것이다.
3) 민중혁명인 4·19
4월 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구조적 모순의 반영이지만 동시에 분단 이후 한국 사회의 모순의 총체적 집약체이며 그 귀결이었다. 4월 혁명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그것이 이후- 적어도 87년 6월 항쟁까지 -남한 사회 변혁 운동의 원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4월 혁명 당시 제기된 민주 변혁과 민족 통일의 요구는 남한 변혁 운동의 선차적, 객관적 과제를 표현해 주는 것으로서 4월 혁명 이후 현재까지 변함없이 제기되고 있다. 즉, 남한 사회가 외세의 정치, 경제적 종속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물론 민주화와 민족 통일의 구체적 조건은 변화했고, 그것의 담당주체도 과거와 동일한 차원에서 논의될 수가 없다. 이러한 변화는 1960년대 이후 급속하게 추진된 자본주의적 공업화와 대규모 노동자 계급의 형성에서 기인하고 있다.
한편 변혁 운동의 주체 역량의 측면에서도 4월 혁명은 남한 변혁 운동의 모델로서 적어도 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는 의미를 상실하지 않았다. 즉, 학생 세력이 변혁 운동에서 선도적 정치 투쟁 집단으로 계속해서 기능해 왔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는 점이다. 물론 학생 운동은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한 대중 운동 세력이었지만 지금은 노동자, 농민, 중간층의 대중운동이 매우 활성화되어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아직 민중이 학생 세력이 수행하는 것 이상의 정치 투쟁의 역량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이것은 민주 변혁과 민족 통일 과제의 의연한 존속이라는 사실- 혹은 계급 투쟁이 '정치' 의 장으로 확대, 전면화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 과 정확히 부합한다.
한편, 변혁 운동의 전개 양상에서도 4월 혁명은 이후 운동의 모델이 되고 있다. 그것은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가두 투쟁과 대중 투쟁을 통한 정치 권력과의 대결의 현상이다. 79년의 부마 민중 항쟁, 광주 민중 항쟁, 6월 투쟁 등은 모두 4·19 당시 도시 가두 투쟁의 양상을 재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투쟁은 제도권 정치의 장에서의 보수 야당과 집권 정당의 갈등 과정에서 대중들이 정치의 장에 견인됨으로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4월 혁명에서 비록 객관적 조건의 제약 때문에 학생 운동을 비롯한 사회 운동 세력은 지배 집단의 반민족적 성격, 반민중적 성격, 반민중적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변혁 운동의 경로를 대중들에게 제시하고 사회 제 조직의 이념을 정립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지만 냉전 질서가 국내의 정치 사회적 영역을 질식시키고 있던 암울한 상황을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그러한 국면을 돌파하려 한 점에서 잠자고 있는 민중들의 의식에 불을 당기고 그들이 삶의 주체로 나서게 하는 계기를 형성해 준 점에서, 이후 운동에 살아 있는 교훈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철저한 민주 변혁을 수행함으로서 시민 사회의 성립을 지향하고 동시에 민족 통일을 성취하려는 지향을 분단 이후 최초로 문제 제기함 점에서 현재까지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7. 참고문헌
박세길,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돌베개, 1989년
한완상, 이우재, 심재택 外, 四一九革命論, 일월총서, 1983년
박현채, 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 소나무, 1987년
김학준, "新東亞", 1982년 4월호
최민지, "한국 YMCA" 197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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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12
  • 저작시기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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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3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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