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문명의 성립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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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그리스 문명의 성립과 발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그리스 문명
2. 호머시대 (The Homeric Age: c. 1200-800 B.C.)
3. 폴리스의 성립과 성격
4. 아테네와 스파르타
5.아테네의 민주정치
6. 그리스의 대내외전쟁

Ⅲ. 결 론

본문내용

서술하는 이야기식 역사가로 알려져 있으며 후자는 사실을 주요 테마중심으로 체계적, 과학적, 합리적으로 서술하는 정치적 역사가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서양의 역사 서술은 이 두 역사가들의 서술방법에 의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다.
1) 페르시아전쟁
페르시아전쟁(B.C. 492-479)은 오리엔트를 통일한 페르시아와 새로 서양문명을 일으키려는 그리스와의 피할 수 없는 일대 충돌이었다. 소아시아를 정복한 다리우스 1세는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려 했으나 그리스와 동맹시들의 진출로 방해를 받자 이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페르시아의 직접적인 방해물은 소아시아에 있던 아테네의 식민지 밀레투스였다. 밀레투스는 페르시아의 영역에 있었으나 그리스의 후원을 믿고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이후 3회에 걸친 싸움이 벌어졌다. 제 1회는 다리우스왕이 밀레투스를 정복하고 그리스본토(헬레스폰트와 트리키아)에 진입하려 했으나 폭풍으로 실패하였으며, 2년 후 제 2회 때는 아테네 북부 마라톤에 진격하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인들은 애국자 밀티아데스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아테네 시민들은 마라톤으로 달려와 소위 마라톤 경주의 유래가 되었다. 특히 마라톤전투의 승리는 시민들의 밀집보병전술의 덕분이었는데 시민들은 이전의 중장비에서 가벼운 경장비의 사용으로 배의 효과를 보게 되었다. 제 3회는 10여년 후에 페르시아 군에 의해 감행되었는데 이 때는 아테네뿐 아니라 스파르타도 대항하였다. 크세르크스의 대원정군은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군을 테르모필레에서 격파하고 아테네까지 함락시켰으나, 살라미스에서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가 인솔하는 해군에게 B.C.480년 대패 당하였다. 전후 에게해 동부연안의 여러 폴리스는 페르시아의 보복에 대비하여 델로스동맹을 맺었다.(477 B.C.) 200여의 동맹 폴리스들은 군사기금으로 대함대를 건조하였으며 본부를 델로스섬에 두었다. 이미 최대의 해군국이 된 아테네는 그 맹주가 되어 지중해 최대의 경제도시로 부상하였다. 이에 다른 동맹 폴리스들의 불만을 사게 되어 결국 내란으로 치닫게 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페르시아전쟁은 동서양의 일대 충돌이자, 전제정치와 민주정치의 대결이었으며, 그리고 지중해상을 주도하려는 상권쟁탈전이었던 것이다.
2) 펠로폰네소스 전쟁
한편 펠로폰네소스전쟁(431-404 B.C.)은 대외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 내에 있어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벌어진 일종의 주도권 쟁탈전이었다. 이 전쟁은 중부지방의 상업도시 코린트와 그 식민지 콜키라와의 분쟁에서 유발되었다. 이 분쟁에서 아테네가 콜키라를 지원하자 코린트는 상권을 지키기 위해 스파르타의 지원을 요청하게 되어 아테네와 스파르타와의 전쟁으로 번지게 되었고 결국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국과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국 사이의 내란으로 확대되었다. 내란 초기 10여 년 간은 양측의 세력이 백중하여 육군이 우수한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공격하면 해군이 우수한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행안을 봉쇄하였다. 그러나 B.C. 429년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사망과 페스트의 만연으로 아테네의 전세가 매우 불리하게 되었다. 아테네는 니키아스조약으로 휴전하다가 다시 시칠리아섬의 스파르타의 동맹시인 시라쿠스를 원정하다가 B.C. 404년 에고스포타미해전에서 함락되고 말았다. 스파르타의 승리는 페르시아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내란 종결 후 소아시아연안의 그리스식민지의 귀속문제를 둘러싸고 스파르타와 페르시아는 다시 분쟁을 시작하였다.
더욱이 스파르타의 전제적 압제에 대항하는 코린트동맹이 결성되어 스파르타의 입장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스파르타는 안탈키타스의 제안으로 페르시아에 양보하는 소위 B.C. 386년 안탈키타스의 평화를 체결하였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운명은 평탄치 않았다. 그리스 중부의 폴리스 테베는 애국자 에파미난도다스에 힘입어 스파르타군을 B.C. 371년 레욱트라전에서 격파하여 그리스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그리스는 결국 테베의 등장으로 군소 폴리스들간의 알력과 반목 등으로 군사적 혼란, 경제적 침체, 사상적 혼미를 거듭하다가 마케도니아에 의해 B.C. 338년 케로네아 전투에서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Ⅲ. 결 론
그리스문명은 로마로 이어져 중세의 유럽, 더 나아가 세계문명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로마가 유럽의 서방세계를 대표한다면 그리스는 유럽의 동방세계를 대표하는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로마가 도시국가를 뛰어넘어 세계제국으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으나 그리스는 지엽적인 폴리스지배로 끝났다. 그러나 정신문화에 있어서는 그 영향이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까지 파급되었다. 그리스에서의 자유로운 인간정신의 발전은 세계사에서 자랑할 수 있는 유산이며 서양문화는 이러한 인간의 자유를 기조로 했기 때문에 더욱 빛나게 되었다. 그러나 자유는 통제와 서로 상치되는 것이므로 그리스는 앞서 설명한바와 같이 정치적으로 분열되었고 통일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의 자유는 로마의 통제는 서양사가 그 긴 역사를 이어간 발전과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만큼 의의를 둘 만하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1. 손에 잡히는 서양사 이야기:진원숙 1999
2. 그리스 문화 연구 여담: 김진경 -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96
3. 그리스 문화사: 그 역사와 문화 - 탐구당 1984
4. 종교개혁 : 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 올리비에 크리스텡 저 - 시공사 1998
5. 서양 근대사 1500-1815 : 노먼 F. 캔토, 사무엘 버너 - 혜안 2000
6. 서양사의 이해 : 임희완 - 박문사 1999
7. 두 얼굴의 유럽문명: 강응천 - 사계절 출판사 1997
8. 서양 문명의 역사 Ⅰ-Ⅱ: Edward McNall Burns, Robert E. Lerner, Standish Meacham 공저 - 소나무 1994-1996
9. 서양문화사 : 정해본, 김민제, 최형식 공저 - 홍익대학교 출판부 1999
10. 서양문화사 연구: 참역사연구회 저 - 지평문화사 1995
11. 서양문화의 이해: 이동섭 - 수서원 1994
12. 서양사 강의: 배영수 - 한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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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18
  • 저작시기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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