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정치와 탕평론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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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언

Ⅱ. 붕당 정치
1. 붕당의 형성 배경
2. 붕당 정치와 서원과의 연관성

Ⅲ. 탕평책
1. 탕평책의 실시 배경
2. 영ㆍ정조대 군주권 강화

Ⅳ. 결론

본문내용

수원성 축조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정비되어 갔다. 다시 말해서 군주권 권위의 재확립 의도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친위부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결국 경과의 성격은 규장각 설치를 통해서 붕당이나 척신의 이해관계와 연결되지 않는 친위 관료세력을 양성하려는 목적과 똑같이, 중견 무반들 역시 붕당이나 척신계와 연결되지 않는 새로운 인재로 키우려는 시도였다.
또 한편 정조는 훈척계열의 중용을 피하기 위한 새로운 군영의 설치를 계획했는데, 이것이 장용위였다. 그 기본정신은 영조와 마찬가지로 중앙군을 조선 초기처럼 5위체제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정조 9년 국왕의 호위만을 전담하는 장용위라는 새로운 부대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이는 숙위소 혁파 이후 새로운 숙위체제를 모색했던 정조가 정조 6년 무예출신 및 무예별감 중에서 장교를 역임했던 자를 대상으로 30명을 선발하여 번갈아 임금의 숙위를 담당시켰던 체제를 공식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숙위전담 장교 집단과 제색군에서만 경ㆍ향의 마보군을 확보하기 시작하였고, 정조 12년이 되면 장용영으로 호칭되면서 17년 내영ㆍ외영제로 제도적 정비를 갖추게 된다.
숙위체제를 비롯한 궁성 호위군의 체제를 새롭게 모색한 것은 금군 자체가 질적으로 저하되고 있는 한계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무과출신자로 임용함으로써 그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경과에서 선발된 무사를 모두 군대에 편입시키기 위한 목적과 결합되면서 장용위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장용영 상층부에서 지휘를 담당했던 무반 군영대장은, 전통적 무반가문 대부분이 탈락 내지 교체되고 신흥 무반세력이 담당하는 현상을 보였다. 장용대장은 정조 19년 이후에는 비변사의 천거를 받도록 되었으나, 3면 이상 추천제인 장망이었고, 특지에 의한 임명이 불가능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국왕인 정조의 주도 하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경과에 합격한 군권 출신 중에는 서얼ㆍ평민이 많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는 이들 계층 중에서 성장하는 세력을 국왕 직속으로 재편성한다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화성 축성에 부역민을 동원하지 않고, 유이민 계층이 중심을 이룬 것으로 생각되는 모군을 동원하여 축조하였다는 사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을 화성을 중심으로 경기지역 일원에 안정시킴으로써 결국 이들 중 상당수를 군사로서 편제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국왕 아래 유이민을 재편제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동시에 화성의 도시화를 위해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도록 정부가 상인 계층을 지원했던 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군주권 강화를 위한 친위군영인 장용영은 1800년 정조의 사망과 동시에 혁파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Ⅳ. 결론
"붕당의 폐허가 요즈음보다 심각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예절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더니, 이제는 한쪽이 다른 쪽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다.......그래서 그들을 모두 멀리 유배를 보내게 되니 어찌 원한이 없겠는가?.......우리 나라의 땅이 본래 좁고 인재 등용의 문도 넓지 아니한데, 근래에 들어 인재를 임용함에 있어 어느 당에 속해 있는가를 따지게 되니......이러한 상태가 그치지 아니하면 조정에 벼슬할 사람이 몇이 있겠는가?.....조정의 신하들이 서로 공격하니, 공론이 막히고 서로가 역당이라고 지목하니 선악을 가릴 수 없다......경향 간의 모든 관리들이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들로서 국가에 보답할 도리와 인척들간에 화목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한 조정안에서 서로 공격만 일삼으니 나라가 어찌 되겠는가?"
영조의 <탕평교서>
붕당정치는 당의 좌ㆍ우 견제를 하며 왕이 올바른 정치를 하게끔 이끄는 것이 정 도인데, 해를 거듭할수록 자신의 당의 이익을 추구하며 나가는 모순에 이어 결국은 생사가 걸린 문제로까지 확장된다. 위에서 제시된 바처럼 그것이 붕당정치의 현실이었다. 이때당시는 신권이 막강하여 왕조차 그들의 여론을 수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영조대에 이르러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ㆍ노력의 일환으로 탕평책을 쓰게 된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 또한 규장각과 장용병 제도 등 탕평책을 제대로 시행하려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한편 그를 기점으로 세도정치가 등장했다고 것은 훈련대장 홍국영의 대두로 인해서 이다. 그 당시 정조는 학문을 사랑하여 규장각 등 문화 정치 면에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국정에 자칫 소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신임하는 신하인 홍국영에게 국정을 맡기게 된 셈이었다. 세도정치란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나 신하가 강력한 권세를 잡고 정치에 관계되는 온갖 일을 제 마음대로 하는 정치를 말한다. 홍국영도 예외는 아니어서 정치에 맛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은 유배 보내져 젊은 나이에 병들어 죽고 만다. 이 사건을 세도정치의 시점으로 사학자들이 보고 있는 관점이다.
요약컨대 영ㆍ정조대에는 붕당 정치의 모순을 벗으려는 노력 차원에서 탕평책을 실시하였고, 이것은 곧 신권강화였던 붕당 정치와는 달리 왕권강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붕당정치와 탕평책의 핵심인 것이다.
***이 글을 마치면서***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 중 '전기는 사림, 선조는 붕당, 영조는 탕평책, 정조는 세도정치 등장'이라는 것을 좀더 자세히 알고픈 마음에 붕당정치와 관련하여 탕평책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여러 역사 서적을 공부하면서 국한문 혼용체로 된 서적을 보는 데 어려움은 다소 있었지만, 옥편을 찾고 하나 하나 공부해 나가면서 폭넓은 역사를 배울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습니다. (참고로 교수님의 "조선 숙종시대의 국방문제"라는 논문의 한문을 찾는데, 1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리면서까지 읽었답니다.)
그리고 "붕당정치와 탕평론의 대두"라는 레포트를 쓰기까지 이 내용을 소화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글을 마무리 짓다보니 마음의 뿌듯함을 느끼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대학 공부라는 것은 찾아서 할수록 끝없고도 험난한, 그러면서도 보람찬 항해길 임을 한번 더 생각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참고문헌 : 1. 조선왕조 오백년 (하)
2. 쟁점으로 본 한국사
3. 한국사 31
4. 한국사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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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21
  • 저작시기2003.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9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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