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간섭과 명성황후 시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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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국간섭과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황후의 정치참여 배경과 과정

Ⅲ. 황후 시해사건의 경과
1. 당시의 국제적 상황 - 삼국간섭
2. 일본정부 주도의 황후 시해

Ⅳ. 황후 시해사건의 결과
- 아관파천과 대한제국의 성립

Ⅴ. 맺는말

본문내용

후와 민씨 척족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다지 곱지 않았다. 또한 일본 어용학자들에 의해 고종과 황후가 악의적으로 폄하해온 것과도 관련 있다. 그러나 황후가 친일적인 급진개화파와 수구적 척사파의 양면에서 비판받았고 일본 관변 측의 미움을 받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황후의 정책 노선이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지니고 있으며 대외적으로 자주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한계점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황후의 '인아거일(引俄拒日)책'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국제관계를 살펴보면, 러시아가 조선, 만주와 국경을 접하고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강압해 조선 침투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에 청의 이홍장은 구미 열강에 대해 조선과의 수교 주선을 맡고 나섰다. 러·일의 한반도 침투를 이들 구미 열강의 힘을 빌려 막겠다는 계략이었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전후로 그의 계획이 어긋나 구미 열강은 조선에 대해 경제 침략을 시작했다. 이 결과 자국의 대한 종구권이 침해당할까 두려워진 이홍장은 조선에 '조중통상장정'을 강압하면서, 대한 종주권을 크게 강화시켰다. 이것이 민씨 정권이 '거청(拒淸)'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그리고 거청을 주장한 이들은 바로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였다. 그들은 영·미의 힘을 빌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일 영국공사 파크스와도 접촉했고, 미국에 특별 사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한영신조약의 체결(1883. 11. 26)로 귀결되면서 실패로 끝났다. 이로써 황후는 이후 묄렌도르프의 주선을 받아 '인아(引俄)'책으로 정책전환을 하게 된다. 한러수교를 맺어 황후가 러시아를 끌어들인 목적은 청의 압제를 배제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러밀약'설이 나돌자 일본의 이토는 이홍장을 찾아가 천진조약을 맺었고,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했으며, 청은 일종의 황후 견제책으로 자국에 유폐되어 있던 대원군을 환국시켰다.
한편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착공과 더불어 그 진출 방향이 동아시아로 전환함으로써 일본은 러시아와의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외교정략론>>에 따르면, 일본은 예정된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먼저 청일전쟁부터 서둘러야했다고 한다.
이런 목적달성을 위해 일본은 방곡령(放穀令)을 빌미로 문제를 일으켰다.
방곡령 사건이란 원산에 주재하던 일본영사(久水三郞)의 항의로 제기된 것으로, 1889년 함경도와 황해도의 지방관들이 일본 상인의 곡물 매점 행위에 대응해 흉년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곡물의 대일 수출을 금지시킨 데어 발단되었다. 이는 한일통상장정(韓日通商章程) 제 27관에 따라 시행하기 1개월 전에 상대에게 사전 통고하도록 되어있는 규정을 조선측이 위반하여, 자국의 함경도 재류상인이 손해를 입게 되었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는 일본 대외 강경파의 수장 오오이시마사미(大石正巳)가 새로 주한공사로 임명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부임과 함께 그는 조선정부를 압박하며 갖은 행패를 부리는 등 갑자기 강화된 일본의 압제로 인해 황후는 '거청(拒淸)'보다는 '거일(拒日)'을 더 시급한 견제대상으로 삼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황후의 '거일(拒日)'책은 3국 간섭으로 일본의 위신이 떨어지자 결정적으로 강화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황후의 '거일(拒日)'책에는 '인아(引俄)'책을 바탕으로 하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내재되어 있었다. 황후가 러시아 주한공사 웨베르의 친절로 러시아와의 친분을 도모했다고 여기었으나, 실상 러시아 정부는 시베리아 철도 완공을 요원했으므로 조선 문제로 인한 일본과의 관계 악화는 원치 않았다. 이것이 황후의 국제정세를 자세히 파악하지 못한 한계점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러·일의 대립 속에서 일본이 러시아의 조선 침투를 전쟁이 아닌 간접적인 방법으로 차단시키려는 선수조치였고, 아관파천은 러시아가 이 같은 일본의 도전에 직면해 역시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대응한 조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러시아와 즉각 전쟁으로 돌입할 수 없었다.
즉, 일본은 러시아를 끌어들인 황후를 시해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자국의 권익을 수호하려 한 데 반해, 러시아는 주권자인 고종을 자국 공사관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일본의 도전에 대응하려 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최문형,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 선전포고 없는 일본의 대러 개전』, 2001, 지식산업사, p.244∼245
그러므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미우라 공사가 주모하는 개인적 차원에서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는 면에서, 일본의 국익 수호를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로서 일본 정부의 개입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대내외적으로 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황후의 개화정책이 가지는 모순성에 치중하는 데에만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황후가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내세운 민씨정권이 국내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황후의 개화정책을 국내 관료들과 민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에 대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 참고자료
최문형,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 선전포고 없는 일본의 대러 개전』, 2001,
지식산업사
한영우,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2001, 효형출판.
이종범 외, 『한국근현대사입문』, 1995, 혜안.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1 :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1999.
崔文衡, 「露日의 對立과 '閔妃'弑害事件」, 1997, 한양대학교 출판부.
[색인]
(ㄱ)
갑신정변(1884.12.4) 6
강화도조약 3
김홍집(제2차) 4
(ㄷ)
단발령(斷髮令) 9
대한정략(對韓政略) 5
(ㄹ)
러청차관협정 5
로바노프(Nobanov-Rostovskii) 5
(ㅁ)
마이코회담 4
민승호(閔升鎬) 2
민치록(閔致祿) 2
(ㅅ)
사할린·쿠릴열도 교환조약 4
삼국간섭 4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3
(ㅇ)
아관파천 10
오토리 8
웨베르 6
을미의병(乙未義兵) 9
이노우에 7, 8
이리분쟁(1871∼1881) 3
(ㅈ)
잠정합동조관(8.20) 8
정동파(친미·친러파) 7
제3차 갑오경장 9
조선책략(朝鮮策略) 4
조일맹약(8.26) 8
(ㅊ)
천진조약 8
(ㅎ)
한러수호통상조약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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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08
  • 저작시기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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