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오순절과 그 후의 박해
본 자료는 7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해당 자료는 7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7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한국의 오순절과 그 후의 박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제 1 부
한국의 오순절과 기타 경험들
1. 첫인상
<윌리엄 블레어 브르스 헌트>
2. 복음을 위한 한국의 준비
3. 어떻게 복음이 이북에 전해졌는가
4. 평양
5. 전도시작
6. 교회를 보살핌
7. 안주
8. 교회의 시련
9. 평양 모임
10. 한국의 오순절
11. 그 결과들

제 2 부
한국 교회의 고난
<브루스 헌트>
12. 일본 점령 기간(1910~1945년)의 고난에 대한 배경
13. 죽기까지 충성한 다섯 사람
<주 기철 목사님>
<박 관준 장로>
<안 영애 양>
<복음 전도자 이 용희>
<복음 전도자 박 의흠>
14. 복음 전도자 김 윤섭의 증언
15. 공산주의와의 투쟁
기독교 자유당
교회에 대한 다른 핍박들
한국전쟁
16. 세 명의 순교자들 : 손 양원과 그의 두 아들

본문내용

한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한 후 공산당원들이 퇴각하고 있을 때, 김 익두 목사는 자기 교회에서 공산당 병사들에게 총에 맞아 죽고 말았다.
기독교 자유당
1947년 11월에 김 화식 목사와 고 한규 장로는 평양의 신학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자유당을 결성했다. 그 목적은 남한과 북한을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한 안(案)을 찾는 것이었다. 단 한 번의 모임도 갖기 이전인 11월 19일에 김 목사와 그 정당의 결성에 연루된 39명이 체포되었으며 그 이후 소식이 끊겼다.
교회에 대한 다른 핍박들
1.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일반인들과 함께, 공적인 일로 끊임없이 소집되었으며, 특히 일요일에는 더욱 그러했다.
2.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을 거의 매일 사상 교육을 위해 모여야 했고, 특별히 일요일에는 더욱 그러했다.
3.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는 중학교나 고등학교 입학 지원서의 종교란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쓰면 진학에 어려움을 겪었다.
만일 그들이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해도, 상황은 어려워 졌다. 그들은 걸핏하면 일요일에도 학교로 소집되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조용히 기도한다는 이유로 초급 중학교에서 제적당했다.
4. 종종 공산당원들은 그들의 정치적 모임을 위해 그리고 정치 선전물을 붙이기 위해 교회 건물을 사용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를 거절하면 교회에 핍박이 따랐다. 복음 전도자 주 영진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반공산당 정당 결성에 반대한 사람들 중에 한 명인데, 그는 창현에 있는 그의 교회에 공산당 포스터를 붙이지 못하게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한 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한국전쟁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죽임을 당한 때는 1950년 6월 25일 이후의 한국 전쟁 시기 동안이었다.
1950년 11월에 있었던 무려 100마일에 달하는 죽음의 행군과 관련하여, 어떤 보도 기자는 일 마일당 한 사람의 비율로 사람들이 죽어갔다고 말한ㄷ. 어는 때는 하루 만에 21명이 총살당하기도 했다. 1950년 9월에 체포된 미국인 죄수들 중 738명 중 살아 남은 사람은 불과 276명뿐이었다. 76명이 총살당했고 5명이 탈주하다 죽었으며, 병들거나 부상당한 16명은 포로 수용소에 내버려졌는데 그 이후 행방이 끊어졌다.
서울에서는, 세브란스 병원의 고 박사, 평양 신학교 교수를 지냈던 남궁 혁 박사, 그리고 송 창운 박사와 다른 저명 인사들이 전쟁 발발 직후에 사라졌으며 그 이후로 소식이 끊겼다. 천 인선 목사는 당시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평양 신학교 교수 중 한 사람인 이 성휘 목사는 총살당했다.
영국 구교회의 선교사도 세 명 사망했다. 찰스 헌트(Charles Hunt) 신부는 병상에서 끌려 나와 포로로 잡혀 있던 중 얼마 후에 사망했다. 메리 클레르(Mary Clare) 자매는 포로 상태에서 죽었고, 이 신부는 사라져 버렸는데 그가 총살당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어떤 제보자에 의하면, 한국 서해안이 전라남도 영광에서 총인구 120,000명 중 40,000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퇴각하는 공산당 군대에 의해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다.
염산(鹽山) 교회에서는 김 방호 목사의 가족 여덟 명 중 아들 하나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동시에 살해되었다. 이 교회에서만도 70인 이상이 살해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칼에, 또 다른 이들은 무거운 돌을 목에 달아 물 속에 빠트려 죽음을 당했다. 어떤 집사는 로프에 묵은 돌이 빠져 나가는 바람에 헤엄쳐서 해변가로 나왔으나 기다리고 있던 공산당원들에게 대나무에 찔려 죽음을 당했다.
같은 지역의 야월 교회에서는, 공산당원들이 주일 학교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교인들을 교회로 불러 모은 뒤 약 80명에 달하는 그들 모두를 살해했다.
황해도 봉산군의 개동 장로 교회는 정규 예배 모임에 약 180명의 교인들이 출석했다. 맥아더가 상륙한 수, '인민 경찰'은 그 교회 교인들을 교회 건물 안에 모이도록 명했다. 공산당원들은 목재 교회 건물에다 불을 놓았으면, 건물 밖에 서 있다가 불길을 피해 밖으로 뛰쳐 나오는 사람들을 쏘아 쓰러뜨렸다. 어떤 식으로든 죽을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깨닫게 된 교인들은 도망갈 생각을 포기했으며, 목격자의 말대로, '깨끗이 죽기로' 결심했다. 불타는 건물이 그들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려 모두가 불에 타 죽을 때까지 목소리를 모두어 찬송을 불렀다.
16. 세 명의 순교자들 : 손 양원과 그의 두 아들
1902년 7월 7일에 경상남도 함안구 구성리에서 태어나 그는 1923년 동경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남도 성경 학원에 입학했다. 그는 그 이듬해에 결혼했고 1925년부터 복음 전도자로서 부산의 나환자 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또한 많은 교회를 개척하기고 했다. 그 뒤 평양 신학교(장로회)에 들어가서 1938년에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그는 '애양원'에 있는 교회의 초빙을 수락했다.
그러나 손 양원 목사가 나환자 촌 밖의 어느 교회에서 특별 집회를 인도할 때 그의 마음에 거리낌을 줄까봐 강단 뒤편에 걸려 있던 일장기를 치워 버린 사실이 발각되자, 그는 경찰서에서 출두 명령을 받았다.
손 목사는 여수 감옥에서 10개월간 갇혀 있었다. 그는 1941년 11월에 재판을 받았으며, 당시에 흔한 죄목이었던 공공 안녕 파괴죄와 반역죄와 불경죄 그리고 이적 행위 등으로 유제 판결을 받고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1943년 8월에 구제 불능의 죄수들을 가구는 감옥에 집어 넣었다.
그는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 그곳에 갇혀 있었다.
해방 이후에, 손 목사는 여수 애양원 나환자 교회의 담임 목사라고 하는 옛 직무로 되돌아갔다.
동인이는 순천 사범 학교에 등록했고 동신이는 순천 중학교에 등록했다. 그들은 열심히 공부하여 실력을 쌓았으며 동료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기독교를 증거하기도 했다. 수많은 한국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후에 미국으로 가서 더 많이 공부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비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1948년 9월 19일 밤에, 여수 경찰 훈련 막사에 체류하고 있던 500명의 무장 공비들이 그들 중 일부를 게릴라전을 위해 제주도로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 가격2,000
  • 페이지수20페이지
  • 등록일2004.06.20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623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