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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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립하였다.
4월 하순 한국에 상륙, 북상한 일본 제1군은 5월 초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과 충돌하여 격파했고, 같은 달 요동 반도에 상륙한 제2군은 난산, 다롄을 점령하고 뤼순을 고립시켰다. 다시 6월에는 만주군 일본총사령부를 설치하고 15개 사단을 동원하였다. 8월 랴오양부근에서 양국군이 첫 번째 대규모적인 접전을 벌였고, 10월의 사허후이전투, 1905년 1월의 헤이거우타이전 등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고전 끝에 모두 승리하였다. 한편 뤼순의 러시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꾀하였으나, 8월 황해에서 일본 해군의 총공격을
받고 항구 안에 봉쇄 당하였다. 뤼순 공략을 맡은 일본의 제3군은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손실을 보았지만 1905년 1월 드디어 공략에 성공하였다. 유럽으로부터 지원군을 얻은 크로파트킹 지휘하의 러시아군 32만과 오야마 이와오가 이끄는 일본군 25만은 3월에 심양에서 만나, 러시아군이 패퇴하였으나 일본군도 사상자가 7만에 이르는 큰 손실을 보았다.
한편 러시아는 육전에서의 패배를 해전에서 만회하려고 로제스트벤스키 지휘하의 발트함대를 회항시켜 5월 27, 28일 대한해협에서 해전을 전개하였으나, 도고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에 격파되어 전멸하였다.
특히 러시아는 계속되는 패전으로 사기가 침체되고 그 해 1월 ‘피의 일요일’로 비롯된 군대의 반란과 농민폭동이 일어나 혁명 진압이 급선무였다. 일본을 지원하였던 영국 미국도 일본의 승리가 만주의 단독 점령으로 발전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미국 프랑스는 3, 4월경 러·일 양국에 강화할 것을 종용하였고, 동해해전 후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인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알선으로 8월 포츠머스 강화회의가 열렸다. 일본의 고무라 주타로 외상과 러시아의 비테 전 재무장관이 참가하여, 남 사할린섬
의 할양을 내용으로 한 조약이 9월 5일 조인되고, 16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조선지배권의 확립과 남만주 진출이 결정되고, 이것이 동시에 대륙의 권익을 꾀하는 미국과의 대립을 가져왔다.
러일전쟁의 결과는 포츠머스 강화회담과 을사조약으로 이어져 한국은 주권을 일본에 거의 빼앗기고 망국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조선 정부는 러·일 간의 급박한 사태를 감안, 1904년 1월 23일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한 채 군대를 서울에 투입
하고 2월 9일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정 2척을 격파하였다. 또한, 2월 23일에는 조선정부를 강압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일본은 이 의정서에 따라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하고 통신망을 접수하였으며, 경부, 경의선의 부설권, 연해의 어업권, 전국의 개간권까지 획득하였다.
이에 일본은 8월 22일 을사조약을 한국과 체결,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고문 정치를 실시하였다. 전승국이 된 일본은 1905년 7월과 8월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각각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인 받았다.
이어 9월의 포츠머스조약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한국의 독점적 지배를 확인 받음으로써 한국의 일본 식민지화는 사실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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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29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8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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