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 농민전쟁의 성격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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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갑오 농민전쟁의 성격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1차 봉기부터 집강소 시기
1) 1차 봉기 전후 정세 - 폐정개혁안을 중심으로
2) 집강소 설치에서 경복궁 쿠데타까지
3) 집강소가 갖는 의미
4) 1차 봉기의 의미

3. 2차 봉기
1) 2차 봉기 전 후 국내외 정세
2) 2차 봉기의 의미

본문내용

다. 농민군의 봉기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요구에 대응한 조선 정부의 태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4. 맺음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차 봉기와 2차 봉기는 각각 반봉건체제와 민족주의적인 항일 성격을 갖고 있다고 일단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1차 봉기에서 집강소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아직 사상적으로 완전한 봉건체제 혁명적 성격 규정에는 한계가 있고, 대안 제시에 있어서도 미흡한 것도 사실이다. 또한 집강소 시기에서 2차 봉기 단계에서 감정적, 일방적인 항일 전선을 형성한 것보다는 현실적 단계에서 고민한 흔적을 엿 볼 수 있었다.
물론 위와 같은 문제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1894년 농민 전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제시한다. 기존 민란처럼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동학이란 종교를 구심점으로 농민 스스로 적극적인 사상 개혁 및 자각을 통해 조직화, 지속화된 양상으로 상향적 개혁을 시도한 점은 기존 민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이는 반대로 당시 지배층의 무능함을 반증하는 것으로도 풀이 될 수 있다. 농민군의 요구 사항은 대체로 시대적 조류에 부합하는 내용이었다. 노비 해방, 토지제도 개혁, 삼정 개혁 등은 근본적으로는 급변하는 세계 흐름 속에서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었던 구제도의 개혁 사항이었으며, 이는 마땅히 조선 정부가 취해야할 의무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단순히 민란의 차원에서 외국 군대 원병 요청, 더 나아가서는 개화파 정부에서 농민군의 요구사항을 통한 현실적인 제도 개혁 및 동반자적 관계 형성이라는 마지막 기회마저 날려 버림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생각한다. 개화파 정부는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일본의 침략성에 대해서 대외적 위기의식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 일본이 이룩한 문명에 신뢰를 부여하며 정권수립의 동반자로 선택하였다. 반면에 이미 대내적 개혁방향을 제시하는 농민군에게는 근거없는 불신을 바탕으로 정권유지를 위한 탄압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농민전쟁은 우리 역사상 의식화되고 조직화된 민족주의 운동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농민전쟁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의식화된 농민들이 기존 민란과는 차별화된 고도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당시 조선이 당면했던 많은 제도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는 점, 짧은 기간이었지만 최초로 농민들 스스로 개혁방향을 제시하고 통치하고자하는 '집강소통치'라는 의미있는 시도를 한 것, 외세의 침략의도를 정확히 판단하여 민중적인 저항을 시도했다는 점 등은 농민전쟁을 통해 알 수 있었던 중요한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 문헌
1. 한국 역사 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4권 」1995, 역사비평사
2. 한국 역사 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권 」1997, 역사비평사
2. 김혜승,「한국 민족주의」1997, 비봉출판사
3. 이근우, 2001 「갑오농민전쟁의 성격에 관한 고찰」
4. 박경환, 2001 「제1차 갑오농민전쟁 발발 과정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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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4.06.30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8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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