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마을과 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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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한국의 대표적 민속마을(개괄)

2.신분제사회의 특성

3.동성촌락의 형성배경

4.명문종가와 문화재

5.경주 양동(良洞)마을

6.안동 하회(河回)마을

7.기타 민속마을(생략)
제주 성읍민속마을
고성 왕곡마을
아산 외암마을
순천 낙안읍성마을

본문내용

를 어느 한 신분에서 찾는 것은 의미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학문과 전통의 도장으로서의 양동마을은 조선전통문화의 맥을 잘 보존해왔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인정된다. 더욱이 마을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고 난 뒤에 가옥의 개축, 가축사육 등에 지장을 받고 잦은 방문객으로 인해 가정과 마을의 분위기가 산만해져가는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지 못하고 마구 집안에 들어와 사진을 찍어대는 방문객의 출입을 주민들은 거부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 마을 역시 젊은 층의 도시전출등으로 인해 심각한 인구의 노화현상을 겪고 있다. 또한 30여채의 고가 중 주민이 거주하는 가옥이 단지 네 집뿐이라는 사실도 이 마을의 미래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5백여년이상을 손·이 양성간 또는 신분간의 갈등과 조화를 겪으면서 지탱해온 그 원동력과 국가에서의 적절한 지원이 있는 한, 이 마을이 조선전통문화의 본고장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게 되리라 생각된다.
6.안동하회마을
1)하회마을의 인문·지리적 배경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마을을 태극모양으로 돌아 흐르므로 하회(河回) 또는 물도리동이라 하며 풍수상 태극형, 연화부수형에 속하는 길지(吉地)이다. 정확한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安東)시 풍천면 하회리이다. 이 마을은 풍산 류(柳)씨 동족마을로서 우리 조상들의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문화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조선조 초 공조전서를 지낸 류종혜(柳從惠)공께서 터를 잡은 후 600여 년을 풍산 류씨가 세거해 온 동족마을이다. 조선중기의 유학자 겸암 류운룡 선생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극복에 큰공을 세운 서애 류성룡 선생으로 인해 크게 이름을 떨친 마을이며,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외침을 한번도 받지 않아 양반층의 웅장한 기와집과 서민들의 초가 토담집에 이르기까지의 전통고가와 민속 및 하회탈춤이 잘 보존되어 오고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국보 2점(징비록, 하회병산탈), 보물 4점, 중요민속자료 10점 등의 지정문화재가 있으며, 충효당의 영모각에 서애선생의 유물 9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하회마을의 지형은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모습이며, 이 마을을 감돌아 흐르는 낙동강과 산줄기가 태극무늬를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는 화산이, 서남북쪽으로는 낙동강이 굽이돌아 마을을 감싸고 있어 외부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여러 차례의 외침으로부터 온전히 보호되어 전통문화와 주위의 수려한 자연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2)하회마을의 중요 문화재
국보 132호 원고본 징비록
국보 121호 민속 공예류 하회탈 및 병산탈
보물 160호 활자본류기타 류성룡종손가문적11종 22점
보물 460호 고문서류기타 서애유물 3종 27점
보물 306호 / 414호 고가 안동양진당 / 충효당
사적 260호 서원(사적) 병산서원
중요민속자료 122호 민속마을 하회마을
중요민속자료 84-91호, 177호 정사 / 가옥 정사-원지정사 / 빈연정사 / 겸암정사 / 옥연정사 가옥-남촌댁 / 북촌댁 / 주일재 / 작전고택 / 하동고택
중요무형문화재 69호 연극 하회별신굿탈놀이
보호수 노거수 삼신당 느티나무
비지정 문화유산 화천서원 / 정려각 / 상봉정 / 기타 고택 / 서낭당 등
2)하회마을의 고택들
양진당(養 眞堂) - 보 물 제306호
하회 풍산 류씨의 대종택으로 문경공(文敬公)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선생의 종택이기도 하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 지붕 목조기와인데, 높은 축대 위에 세워져 누각과 같은 자태를 드러낸다. 사랑채 정면에는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당당하게 게판되어 있는데, 입암은 겸암 선생의 부친인 입암 류중영 선생을 말한다. 현재 남아 있는 이 건물은 조선초에 축조된 것으로 당호로 쓰이는 양진당은 겸암 선생의 6대손인 영(泳)공의 호에서 취한 것이다. 양진당 현판은 근세 사람 최동진의 자필이다.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남향)의 남향집이며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양진당의 사당은 크고 작은 두 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입암 류중영 선생의 불천위(不遷位 - 끼친 덕과 공이 4대만에 제사를 그만두기에는 죄송해서 국가나 사회에서 영원무궁토록 제사를 지내게 한 제도, 서애, 겸암, 입암선생 들이 불천위이다) 사당이며, 하나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겸암 류운룡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다. 이처럼 풍산 류씨 대종택인 양진당에는 두 위(位)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겸암 선생 불천위 사당 담 너머로는 마을의 역사를 말해 주듯 수령이 800여년 이상 된 거대한 느티나무가 보이는데, 동신으로 모시는 '삼신당'이 자리잡고 있다. 학록정사 옆으로 난 좁은 골목으로 진입할 수 있다.
충효당(忠孝堂) - 보물 제 414호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 극복에 앞장 섰던 문충공(文忠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종택이다. 선생이 삼칸 초옥(草屋)인 농환재(弄丸齋, 풍산읍 서미리)에서 별세한 뒤 일생을 청백하게 지낸 선생의 유덕(遺德)을 기리는 수많은 유림들의 도우을 받아 장손인 졸재 원지(元之)공이 처음 창건하였고, 그의 아들 의하(宜河)공이 확장 중수한 조선 중엽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충효당 전서체(篆書體)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인 우의정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의 친필이다. 충효당 기문은 1706년 연안인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가 지은 것을 282년 뒤인 1988년에 서하인 (西河人) 임창순(任昌淳)의 글씨로 개판해 두고 있다. 충효당이란 당호는 서애 선생의 증손자인 익찬 벼슬을 역임한 우눌재(愚訥齎) 류의하(柳宜河)대에 게판되었으며 기문은 우눌재의 손자인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 대에 식산 이만부에게 청해 완성되었다. 모두 52칸이 남아 있다. 종택에는 가장 신성한 공간인 불천위 사당과 유물전시관인 영모각이 있다. 불천위 사당 앞에는 일명 만지송(萬枝松)이 장관이며, 종택 행랑채 앞마당에는 다소 원형이 손상된 불탑이 복원되어 있는데, 이 탑은 원래 서애선생의 재사(齋舍)인 상로재(霜露齋) 뒷편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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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12
  • 저작시기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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