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역사 인식 문제에 관한 총체적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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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역사 인식 문제에 관한 총체적 보고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 일본 교과서 왜곡의 문제 인식

Ⅱ. 구체적인 교과서 왜곡 사례
1. 임나일본부
2. 삼국의 조공설
3. 임진왜란
4. 강화도사건
5.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6. 정한론
7. 한일합병
8. 종군대위안부

Ⅲ. 왜 일본은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려 하는가?
1. 역사문제 정치 공약화
2. 극우세력의 전위집단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모임'
3. 경제불황의 영향
4. 전후 일본제국주의의 과거청산 미흡

Ⅳ. 다차원적 대응방안
1. 국내의 대응
2. 국외의 대응
3. 세계의 반응

Ⅴ. 결론

Ⅵ. 참고자료
1. 임나일본부
2. 정한론
3. 외국 교과서 한국 왜곡 실태

본문내용

로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은 많다. '백제 그 다음에 신라', '백제, 그러나 신라', '백제, 그러나 신라', '신라를 위하여 백제', '백제와 그 신라'
또한 왜의 임나지배 사실은 한반도 계통의 사서에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며, 가야 지역의 고고학적 유물에 일본적 요소가 거의 없다는 것도 문제로 남아있다. 200년간이나 왜의 지배를 받았다는 가야 지역에 일본 유물이 거의 없다는 것은 임나일본부설이 원래부터 틀린 주장이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 정한론
정한론의 내용
정한론은 1870 73년 무렵 일본정부 내에서 고조된 한국 침략론으로. 일본에서는 에도바쿠후〔江戶幕府〕말기에 국학의 보급과 함께 조선멸시론이 일어나 한국을 침략하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1867년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후 왕정복고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국교를 청하는 사신을 보냈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집권 아래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척왜정책(斥倭政策)에 기울어 있던 조선이 서계(書契;외교문서)가 종전과 다르다며 개수(改修)를 요구하고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는 등 국교 교섭에 난항이 거듭되자 정한론이 점차 대두되었다. 70년(고종 7) 2월 서계 불수리(不受理)의 이유를 따지러 온 사다 소이치로(佐田素一郎)는 일본으로 돌아가 강경하고도 구체적인 정한론의 건백서(建白書)를 정부에 제출하는 등, 봉건군벌의 여력(餘力)과 신흥 자본주의 세력을 앞세우고 대륙침략을 주장하는 무리가 유력하게 대두하였다. 또한 신미양요를 전후해서는 외무대승(外務大丞) 마루야마 사쿠야쿠(丸山作樂)가 동지를 규합하여 조선을 침공하려는 음모사건이 발생할 만큼 정한론이 고조되었다. 특히 메이지유신을 적극 지지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등의 중요 인물들이 정한론에 적극 가담하자 일본정부는 하나부사 요시모토 (花房義質)를 조선에 파견, 강경한 담판을 시도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은 이를 묵살하였다. 한편 부산 일대에서 일본상인들에 의한 밀무역이 성행하여 조선정부에서는 이를 엄히 단속하라는 전령서(傳令書)를 내렸는데 일본 정부는 이에 흥분, 정한론의 실천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는 대병력의 동원을 주장하고 스스로 대사(大使)의 책임을 맡겠다고 자원하기도 하였다. 이때 서양 여러 나라에 파견되었던 사절들이 귀국하였는데, 이들은 내치(內治)에 보다 충실해야 한다며 정한론을 반대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 정부 내에 대립과 분열이 일어났는데 결국은 정한론의 패배로 끝나 정한론은 일시 휴식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은 1875년 강화도사건(江華島事件)을 일으켜 한·일 수호조약을 체결하는 등 조선에 대한 침략을 계속하였다.
3. 외국 교과서 한국 왜곡 실태 <출처 :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발표한 자료 요약>
미국
- 일본은 한국의 남쪽 가장자리에 무역기지나 군사적 식민지를 유지하였다.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화)
- 일본의 한국통치기간은 40년
영국
- 366∼562년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정복했다.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화)
캐나다
- 한국은 수백년 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다.
- 일본은 한국땅에 커다란 발전을 이룩했다. 철도·도로·항구를 건설했으며 산업을 발달시켰고 교육의 기회를 확대시키려 노력했다.
스페인
- 기나긴 역사를 통해 중국과 러시아, 일본의 지배를 경험했다.
- 한국의 종교는 불교, 문자는 한자이다.
독일
- 1905년부터 한국은 일본 지배하에 있었다
- 비무장지대에 국경수비대의 폭력적 충돌이 빈번하다. 양국 정부가 강력한 병력을 유지하고 자국 내부의 독재를 유지시키기 위해 상호 도발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한다
오스트리아
- 1주일에 6일 동안 50∼60시간 노동하고 중소기업이나 가족기업에서는 약 70시간을 노동한다.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은 시간당 2.6달러고 여성의 임금은 절반도 안된다 (한국을 완전 후진국으로 묘사)
- 한민족은 시베리아의 퉁구스 인종이다.
멕시코
- 한국을 백인종지역으로 표시
- 공산주의 국가에 한국 포함
- 서울의 인구를 4백만명 이하로 기술
- 한국을 독일식민지로 표시
폴란드
- 6.25전쟁을 남한의 북침으로 기술.
인도네시아
- 당나라는 한국과 일본을 지배하였다.
- 1894년 일본이 중국을 침공했다. 중국은 일본에 쉽게 항복했는데 그 결과 중국은 대만과 한국을 일본측에 넘겨줘야 했다.
태국
- 17세기경에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이 관계는 중국이 약해진 19세기 말까지 계속 됐다.
- 한국전쟁 이후 남한은 군부지도자를 최고통치자로 하는 체제를 채택했다.
- 한국은 7세기께 통일된 국가를 형성했는데 그 나라는 신라이고 중국의 지원을 받아 통치했으나 17세기경 중국의 지배에 들어갔고 이것이 19세기 말까지 지속됐다.
- 동해는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으며 불교국이다.
필리핀
- 북한 사람은 남한 사람에 비해 키가 크고 강건하며 더 하얗다. 그들이 몽고 혈통이기 때문이다. 남한 사람은 말레이 인종과 혼혈이며 검고 작다.
- 신라의 금관에서 볼 수 있는 곡선모양의 보석들은 일본제국 상징의 흔적이었다.
- 야마토 정권의 진고(神功)천황이 정복자로서 한국에 왔었고 일본의 한국통치는 668년 한반도가 권력조직을 확립하기까지 지속됐다.
- 일본은 군국주의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새 질서를 수립함으로써 만주국, 한국, 내몽골, 중국 등에 평화와 안전을 주려고 했다.
참고문헌 -----------------------------------------------------
1. 강만길 외, 2003, 우리의 역사를 의심한다, 서해문집
2. 김정환, 1996, 상상하는 한국사2, 푸른숲
3. 김한종, 2001, 역사왜곡과 우리의 역사교육, 책세상
4. 역사비평편집위원회, 2002, 한국 전근대사의 주요 쟁점, 역사비평사
5. 이성무, 2002, 한국역사의 이해 4, 집문당
6. 이이화, 1998, 한국사이야기2, 한길사
7. 홍윤기, 2001, 일본의 역사 왜곡, 학민사
8. 한일관계사학회, 1998, 한국과 일본 왜곡과 콤플렉스의 역사1, 자작나무
9. 국회도서관 http://www.nanet.go.kr/japan/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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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18
  • 저작시기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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