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파병의 찬반>에 관한 총체적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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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라크 파병의 찬반>에 관한 총체적 보고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파병 찬성의견
1) 경제적 이익
2) 북핵문제와 한미동맹 연대강화 등 국가 안보
3) 세계 평화유지와 인도주의적 지원활동
4) 미국과의 마찰로 생길 불이익을 피함
2. 찬성의견의 비판
3. 파병 반대의견
1) 이라크 전쟁의 실제적 이유는 석유전쟁이다.
2)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UN헌장 위반이며, 한국군의 참전 역시 UN헌장의 위반이다.
3) 더 이상의 환경파괴와 인명살상이 자행되어서는 안된다.
4) 파병은 전쟁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5) 국익을 위한 파병?
6) 파병이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7) 국민의 상당수 반대 및 세계여론 상당수 반대
4. 반대의견의 비판
5. 토론주제

Ⅲ. 결론
1. 《광해군》을 통해 보는 실리외교
2. 결론

본문내용

正)을 도모했다.
[인조실록1권], 인조1년 3월 갑진
결국, 첫째는 친형인 임해군과 이복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여 인륜을 어겼다는 것이고,
둘째는 전통적으로 우호 관계에 있고, 특히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의 은혜를 배반하였다는 점이다. 이 두가지 죄목은 광해군을 쫓아 낸 인조와 서인들의 주장인데 그후 다시 검토된 점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광해군을 폭군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왕의 시호는 권력을 가진 세력이 붙이는 것이고 다분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광해군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1910년 조선이 망할 때까지 한번도 다시금 광해군의 지위가 바뀌지 않은 것은 서인세력이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잠시 남인이 정권을 잡은 적도 있으나 광해군의 정치배경인 북인이 남인이 존경하는 이언적과 이황을 분묘 배향에서 빼고, 대신에 북인이 떠받드는 조식을 넣으려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불만을 품었고 남인 역시 광해군을 새롭게 평가하지 않은 것이다. 이 사건은 1610년(광해군 2) 9월에 '사림5현'의 문묘종사가 있었는데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이 불만을 품으면서 발생했던 문제이다. 사림5현은 김광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었다.
4)폐위에 원인에 대한 평가
첫째로 패륜행위에 대하여서 볼 때, 광해군이 친형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궁궐에 가둔 것은 분명히 도덕적으로 잘못이다. 그러나 세자였던 광해군은 영창대군의 출생으로 세자의 자리가 위태로웠고,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광해군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문제였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행위가 정당화되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태종이 방석, 방번을 그리고 세조가 단종을 또한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죽였지만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 이것은 결국 권력을 가진 세력의 비호 속에서 그러한 일들이 이루어진 것이다. 광해군 역시 지지세력이 강하였다면 왕에서 쫓겨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째로, 명을 배신하였다는 점이다. 당시 국제 정세는 새로이 떠오르는 후금이 명을 제압하는 형세였다. 그런데 명이 후금과 전쟁을 벌이려고 조선에 병사를 요청해 왔다. 전통적인 관계로 보나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준 의리로 보나 명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신진 세력인 후금(후에 청나라가 된다)을 무시하는 행동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강홍립에게 명나라 군대를 원조하되 형세를 보아 후금에 항복하고, 부득이 원조하게 되었음을 해명하라고 하였다.
이는 명과 후금 두 나라에 불만을 사지 않는 중립외교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했어야 한다. 하지만, 서인들은 이를 큰 죄목으로 들고 나온 것이다. 결국 인조와 서인의 정권은 중립 노선의 폐기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고집하다가, 결국 청에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하는 국난을 겪게 된다.
5)광해군의 재평가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서적편찬, 사고정비, 성곽과 병기의 수리, 호패의 실시 등 임진왜란 뒤의 국가의 복구와 민생 안정에 힘을 쓴 '왕'이였다. 문화사업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찬술과 [동의보감]의 간행, [삼강행실도]를 보급하여 어지러운 사회의 기풍을 쇄신하고자 했으며, 포도청의 상설기구화로 사회 불안을 해소하면 민심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또한 빠른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자주적이고 실리적인 중립외교로 대외적 안정에 힘을 쏟으며, 진보(鎭堡)의 확충으로 외침을 방어하기도 했다.
우리는 권력을 잡고 있는 이들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진실을 은폐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을 역사 속에서 목격하고 있다. 결국 왕의 찬탈을 정당화하고자 내린 광해군의 평가는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2.결론
노무현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만 하더라도 대미관계에 있어 자주정부를 지향할 것을 수 차례 공언해왔다. 그러나 미국의 이라크 침략 과정에서 노무현정부가 지향했던 자주적 대미 관계는 예의 전통적 한미관계로 돌아갔다. 미국의 파병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파병 동의안을 국회에 내놓았고 파병은 결정되었다. 그러나 전쟁반대의 물결은 전 지구적으로 일었다. 이는 곧 이라크 전쟁이 명분과 당위 획득에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무현정부는 파병을 통해 이른바 북핵 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양보는 얻어낸다는 한반도 안보전략 차원에서 접근했다. 그러나 되돌아 온 미국의 소리는 ‘이라크 다음은 한반도’였다. 그렇다면 노무현대통령의 대미전략은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유효한 것인가. 우리는 이를 능란한 중립외교를 펼쳤던 임금 ‘광해군’을 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재의 한국적 상황과 당시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정학적 리스크를 안고 있는 점은 여러모로 닮은 것도 있다. 광해군의 외교정책 기조는 강대국과 위협국을 상대로 한 평화의 동시수행 전략이었다. 지금은 단순 셈법 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만큼 복잡한 관계이지만 우선 공병파병은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이라크를 비롯한 아랍권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등 명분과 실리를 잘 조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공병파병을 통해 북핵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양보를 얻어낸다는 것 또한 너무 위험하고 순진한 발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부시를 중심으로 한 미국 공화당은 석유자본, 군수자본, 극우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에 기반을 둔 정파라는 것을 잘 알고 이들의 정책결정집단들의 성격을 잘 파악해야 한다
90년대 초반 공산권이 몰락하자 미국은 유일패권을 세계에 천명하고 자기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라크, 이란, 리비아, 쿠바, 북한 등의 군소국가들을 단시일내에 붕괴시키는데 유엔 안보리가 이런 목표 수행에 동의하지 않을 때는 가차없이 단독 군사행동에 나선다는 입장인데, 변화를 기대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정권의 정체성마저 훼손해 가며 대미 외교를 벌이는 우리 정부를 보며 우리는 약소국의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광해군이 후금에 대한 정확한 정보력으로 중립정치를 했던 것처럼 우리도 국제정세를 정확히 볼 줄 아는 정보력을 키워 현실적 판단에 근거한 정치외교를 폈을 때만이 당당한 자주정부를 만들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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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8.01
  • 저작시기2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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