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의 식민지성
본 자료는 2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해당 자료는 2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2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한국미의 식민지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미술사 인식의 출발 - 식민지 시대

2. 柳宗悅(야나기 무네요시 1889-1961)
1) 최대의 인물, 한국문화론
2) 애정의 실체

3. 타자화된 주체의 수용과 반발 - ‘탈식민’의 한계
1) 수용
2) 민족주의적 비판과 한계

4. 탈식민은 어떻게?

본문내용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그 가치가 귀해 아껴서 써야만 했다. 그래서 조선전기의 실록에는 청화의 재료인 코발트 광산을 발견하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린다는 기록이 등장하며, 이 때 土靑을 발견해서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토청은 회청에 비해서 색깔이 탁하고, 그나마 얼마 없었기 때문에 결국 수입된 고가의 회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당시에 청화백자는 상류층만이 쓸 수 있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조선전기 실록에는 청화백자에 대한 갈망과, 사치품이라는 이유로 금지령이 내려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게다가 백자는 유학의 광범한 보급과 함께 祭器에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화려한 문양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이러한 결핍상태는 19세기 무렵 중국에서 자체 생산되는 청화안료를 싼 값에 대량으로 수입할 수 있게 되자 비로소 해결되었다. 조선후기에 청화를 마음껏 사용한 청화백자가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예를 보더라도 화려함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특징이며, 조선사람이라 해서 순백만을 숭상했던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사회적인 분위기에 따라 그 양상은 약간씩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고는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사회적인 현상으로 해석해야지 민족성의 표출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
- 흔히 한국의 건축물들이 중국과 일본에 비해 소박아담하고 자연스러워서 주변을 압도하는 권위가 없다고들 이야기한다. 아마 이러한 정의는 고유섭이 말한 ‘무기교의 기교’나 ‘무관심의 포용력’ 등과 같은 정의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중국일본과 한국을 민족국가적인 단위로 비교한다면 맞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전근대 신분제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느낌과는 걸맞지 않는 표현이다. 상상해보라. 향촌의 볼품없는 초가에서 살고 있던 가난한 백성의 눈으로 보기에, 같은 고을에 부유한 양반이 솟을 대문을 통해 집을 짓고서 99칸 되는 기와집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을, 주자선생과 퇴계율곡 선생을 모시고 풍광 좋은 곳에 자리잡은 채 주로 양반들만이 드나들던 서원과 향교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을, 한양에 올라와서 왕궁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주변에서 몇 채인지도 모를 기와의 물결이 바다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더구나 이러한 건물들이 단순히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품격있는 아름다움까지 지녔다면, 자연히 그 거대한 권위에 압도될 뿐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존경과 부러움이 저절로 우러날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생략한 채 단지 건축학적인 기교나 규모의 비교를 하는 것은 잘못이다. 지금은 귀족의 세련됨도 양반의 권위도 심지의 국왕의 위엄도 모두 사라진 시대이며, 우리는 아무런 제지없이 편안하게 재미삼아 우리 전통 건축물을 찾지만.
- 한국적인 것의 강박/ 그러면서도 다름을 다르게 찾아야./ 다른 발언과 다른 맥락들을 보아야 할 것. 어떻다는 규정은 비교사적 관점의 연속. 그런 비교는 차이를 보여주기보다는 차별일 것. 그것은 그 비교의 맥락 자체가 근대 제국-식민의 틀 속에서 생산된 것. 서구중심적인 것. ....그러면 어떻게?

키워드

한국미,   식민지성,   미술사,   미술,   ,   탈식민,   예술
  • 가격1,3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4.08.01
  • 저작시기2004.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237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