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련지구에 있는 4개의 고구려 산성에 대한 소고와 비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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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지세가 험해 쉽게 지킬 수 있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곳으로 이름나 있다. 이 곳은 사면이 절벽이고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서문뿐이다. 서문이 자리하고 있는 어귀는 동서로 약 1km쯤 되는 산골짜기이다. 골짜기 서쪽은 봉황산(鳳凰山)이고 동남 500m 지점이 비사성 봉황구(鳳凰口)이다. 서문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가면 골짜기가 깊고, 수목이 울창하고, 산세가 험하고 가파르며, 기후가 잘 변한다. 산골짜기 북쪽에는 지금도 원·명 때의 건물터를 볼 수 있다. 이곳을 "요자구( 子口, '새매어귀'라는 뜻)"라고 부르는데 일찍이 이곳에 늘 새매( 子)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새매어귀 아래는 "내학석(來鶴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민간전설에 따르면 선인(仙人)들이 머물다 간 곳이라고 한다. 골짜기를 따라 동쪽으로 더 가면 "적수호(滴水壺)"와 "음마만(飮馬 )"에 이른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당 태종이 적수호(滴水壺)에서 물을 마신 적이 있고 설인귀(薛仁貴)가 음마만에서 말에게 물을 먹인 적이 있다고 한다(민간전설이지 역사적 근거는 없다). 이 두 가닥의 맑은 샘은 오늘날까지 물 맑기가 거울 같고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적수호와 음마만 북쪽 가파른 벼랑에는 민요에서 "일보일층천(一步一層天)
) 옮긴이 주 : '한 걸음에 한 층씩 올라가야 하는 하늘'이란 뜻으로 오르기 힘든 가파른 곳을 나타낸다.
"이라고 노래한 산길 "십팔반(十八盤)"이 있다. 십팔반을 넘으면 전설에 당나라 왕이 병을 치료하였다는 석고사(石鼓寺, 唐王殿)에 이른다. 석고사는 수·당 때 처음 세워졌는데, 이 산성 밖에 있는 승수사(勝水寺), 조양사(朝陽寺), 향수관(響水觀) 같은 명·청 때의 건축과 함께 대흑산의 명승고적이다.
사료에 나온 기록에 따르면 비사성에서는 역사상 여러 차례 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수 양제 대업(大業) 10년(614) 천주자사(泉州刺史)·대장 내호아(來護兒)가 군사를 이끌고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쳤다고 했고, 『자치통감』 권182에는 "가을 7월 …… 내호아가 비사성에 이르니 고구려 군이 맞아 싸우므로 내호아가 격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정관(貞觀) 19년(645) 이세민(李世民)이 친히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資治通鑑』 권197에 "645년, 장량(張亮)이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비사성을 습격하였는데, 그 성은 4면이 절벽이고 서문을 통해서만 올라갈 수 있었다. 정명진(程名振)은 군사를 이끌고 밤에 이르고 부총관(副總管) 왕문도(王文度)는 먼저 성으로 올라갔다. 5월 기사(己巳),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8000명을 붙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사성은 천년의 풍상을 겪었지만 오늘날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1963년 성인민정부(省人民政府)가 성급(省級) 문화재보호지구(省級文物保護單位)로 지정하였다. 현재 금주구(金州區) 인민정부는 자금을 투자하여 산성 안팎에 있는 옛 건축물들을 수리를 하고 새로운 도로를 만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곳은 사람들이 옛터를 탐방하고 관광하는 데 좋은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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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9.08
  • 저작시기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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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65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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