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고구려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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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夫餘의 地理的 位置와 周邊國과의 關係.
Ⅲ. 夫餘의 通治體制
Ⅳ. 夫餘의 通治組織과 관련한 關防體系
Ⅴ. 夫餘의 城郭과 關防體系
Ⅵ. 맺음말

본문내용

있다. 夫餘의 사방에 위치한 성들은 그 규모에 따라 中型城과 小型城으로 나눌 수 있는데, 中型城의 경우 대부분 사출도의 중요 거점 지역에 위치해 있어, 행정적 혹은 군사적으로 重鎭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小型城들의 경우 소읍의 행정적 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夫餘의 中型城으로는 輝發城 이 성은 충적평원 지대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輝發山 정상에 위치해 있어 군사적으로 천연의 요새 역할을 하고 있다. 이로 인해 원시시대부터 휘발하 중류일대의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되었고 부여시기에 이어 고구려시기에도 이 일대를 통제하는 거점성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二龍瑚古城慶華古城등이 있다, 輝發城은 부여경내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산의 해발고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평원 한 가운데 솟아 있어 이 지역 일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고대에서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되어 왔으며, 夫餘시기에는 남쪽의 高句麗의 북진을 방어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성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二龍湖古城은 夫餘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그 규모로 보아 부여시기 서남부의 重鎭중에 하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성이 위치한 지역은 주변이 높은 산들로 둘러 쌓인 분지 지형으로, 성의 동쪽은 東遼河가 만나 二龍糊를 형성하고 있으며, 다른 삼면은 야트막한 절벽과 구릉으로 형성되어 있다. 부여시기 서남쪽에는 중원세력과 鮮卑세력이 포진해 있었으나, 이 성의 주 방어방향을 서남쪽으로 볼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이 서남쪽에서 도성으로 향하는 交通路로 보기에는 그 근접지형이 너무 험준한 편이다.따라서 이 성은 이 지역을 지배하던 비교적 규모가 큰 邑落의 행정군사적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慶華古城은 夫餘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부여시기 북부의 행정군사적 重鎭중에 하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당시 夫餘의 동북쪽에 존재하는 婁세력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이 성의 주 방어방향이 동북쪽을 향해 있었다.
小型城으로는 新街古城福來東古城上河灣鎭보루군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小型城들은 그 기능에 따라 行在城과 堡壘로 나뉜다. 行在城은 대부분 소규모 邑落의 통치지배 집단이 거주하면서 행정기능을 담당하고, 전시에는 방어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여 지는데 新街古城과 福來東古城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런 규모의 行在城들은 규모가 너무 작았던 관계로 대규모 전쟁시에는 농성과 방어에 있어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堡壘는 대부분 交通路 요충지 부근의 높은 산 위에 위치해 있는데, 대체로 적정을 살피기 위한 군사적 조망시설이나 위급한 상황을 이웃 거점성에 보고하기 위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로 인해 대규모 군대가 주둔하거나 주민이 거주하는 일반적인 山城 과 달리 적정을 살피기 위한 소규모 인원만 주둔하였기 때문에 성곽시설이 아주 간단하다. 堡壘기능을 가진 성으로는 上河灣鎭 堡壘群이 대표적이다. 이들 堡壘群은 남쪽과 북쪽을 잇는 交通路상에 위치해 있고 주 방어방향이 남북으로 향해 있다. 이들 堡壘群은 이 지역을 지배하던 세력집단이 자체 방어를 위해 구축해 놓은 방어시설로 생각되는데 부여경내에서는 貧縣일대와 上河灣鎭일대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이종수,「夫餘]城郭의 特徵과 關防體系 硏究」『백산학보』67, 2003.
Ⅵ. 맺음말.
지리적 위치상 대평원에 자리 잡은 夫餘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는 데에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沃沮, 서쪽으로는 鮮卑族, 남쪽으로는 高句麗, 북쪽으로는 婁(勿吉)등 夫餘地域은 유목민과 농경민이 서로 교차하는 중간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에 주변세력의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영향 받았다. 그리하여, 역사의 전 기간 동안 夫餘는 中國의 왕조들과 비교적 잦은 교류를 하며 가깝게 지냈으나, 북방 유목민족과 高句麗와는 대립해 왔다. 이런 대외 관계는 지역의 독자성이 강하고 연맹체적 합의제적 성격이 강한 夫餘의 통치체제 아래 關防體系에 있어 몇 가지 특징적 요소를 갖게 한다. 첫째로 주방어 방향이 서남쪽을 향한 都城이 중앙에 위치하여 원심형을 이루고 있었고 둘째 이러한 원심형 關防體系가 전체적으로 복합적인 연결 구도가 아니라 각각의 지역이 자체 방어를 위한 독자적인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셋째, 平地城과 山城이 한조를 이루어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都城의 방어체제는 먼저 지형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가장 방어에 유리한 군사적 요충지에 都城이 입지해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都城 부근에는 모두 3기의 山城과 2기의 平地城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들은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防禦에 가장 적합하도록 설계되어있다. 지방 방어체제는 “四出道”와 연결되어 지역마다 자체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데 中型城은 四出道의 중요 거점 지역에 위치해 행정군사적으로 重鎭역할을 담당하며 小型城은 군사적인 방어의 목적보다는 행정과 지배세력의 거주기능을 주로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夫餘의 關防體系에 대해 조사를 하며 느낀 점은 夫餘가 지리적으로 그 유적을 직접 접할 수없다는 한계성과 더불어 문헌자료 또한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關防體系의 기본이 되는 城郭은 제대로 된 발굴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아 高句麗나 中國의 사서에 명시된 내용을 바탕으로 연구되고 있어 객관성이 떨어진 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러한 夫餘史 연구의 문제점은 철저한 현지조사 등으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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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夫餘]城郭의 特徵과 關防體系 硏究」『백산학보』6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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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정, 「古朝鮮 夫餘의 국가구조와 정치운영」『한국고대사연구』1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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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綿厚, 유태용, 「고대 부여의 흥망과 王城의 변천」, 『백산학보』58,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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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래, 「古代山城의 發生과 變遷」, 『馬韓, 百濟文化 』11,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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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1.21
  • 저작시기2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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