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세사] 고려 귀족사회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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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성종대 지배체제의 정비
2)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이념과 최승로의 시무책
3)정치적 지배세력의 상황과 성격

본문내용

종조 무렵에 성립되었다고 생각된다. 음서에 대한 실제적인 사료는 목종 즉위년(9970에 처음 보이지만 이미 성종대부터 실시되었다고 생각된다. 5품 이상의 관료들을 그 이하와는 달리 특별 대우를 하고 있는 기사가 여럿 보이기 때문이다. 좀더 좁혀 생각해 본다면 중앙과 지방의 관제 정비와 문·무산계의 정비가 이루어진 성종 14년 무렵에 음서제도가 마련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성종대의 지배세력들이 서서히 귀족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는 하나의 단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 이들은 관직생활의 대가로 전시과라는 토지를 받음으로써 경제적인 토대도 구축해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현종 12년(1021)에 보이는 공음전(功蔭田)의 존재도 이미 성종대 무렵에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이들이 중앙관료로 서서히 귀족화하기 시작함으로써 지방에 남아 있던 그들의 친족과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즉 재지세력(在地勢力)과 재경세력(在京勢力)으로 분리되었던 것이다. 일단 과거나 음서 등을 통하여 중앙관료로가 된 이들은 여러 가지 특권 때문에 본향으로 내려 가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범죄를 범한 자들을 고향으로 강제 퇴거시키는 「歸鄕」이 형벌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귀향죄가 언제 성립되었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종 7년에, 감독에 임한 관리가 스스로 도둑질하였을 때에는 장물(臟物)의 다소를 막론하고 모두 본관(本貫)으로 유배토록 한 조치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성종대에도 이러한 분위기가 있었지 않나 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성종대의 지배세력은 신라의 6두품 계열이나 과거 합격자를 비롯한 유신(儒臣)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추구한 당시의 상황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약간의 대립과 갈등은 있었다. 이른바 최승로 계열과 서희 계열이 그것이었다. 전자는 적극적으로 성종의 유교정책과 중화정책을 지지하였고 후자는 이러한 성종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전통을 중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중앙관료로서 관직에 따른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토대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지위를 세습시키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음서제나 공음전제도, 그리고 귀향죄 등의 제도가 탄생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제 지방과의 연계관계를 끊고도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갔다. 즉 중앙귀족적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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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9.30
  • 저작시기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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