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직업 - 기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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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기녀의 기원
1) 원화제도
2) 무녀에서의 기원
3) 노비 및 국가 간 전쟁에 의한 유민에서의 기원

3. 기녀층의 성립
1) 생구 및 노획에 의한 기녀층
2) 화매에 의한 기녀층
3) 적몰에 의한 기녀층
4) 형벌에 의한 기녀층
5) 천자수모법에 의한 기녀층

4. 기녀의 유형
1) 소속에 따른 구분
2) 성별에 따른 구분

5. 기녀층의 생활 및 풍속 : 기녀의 대상을 중심으로
1) 왕
2) 사대부
3) 평민

6. 맺음말

본문내용

이오?" 통이 바라보다가 멈춰서서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장난을 좀 하였네"하였다.
사대부가 기녀의 장기적인 대상이 되어 그의 첩이 되면 기녀의 생활은 자유인으로서보다는 가정의 일원으로서 가정의 질서를 지키며, 그 소속된 가정생활 습관에 맞추어 살아야 하였다. 또한 처첩 간의 갈등이 심했으므로 처와의 관계, 자신이 낳은 자식과 적자와의 관계 등을 잘 조절할 수 있어야 했다. 적처가 하는 일은 女婢나 첩을 잘 다스리는 것과 적자 적부 적손 등이 모두 첩모를 능멸하거나 참소하지 않도록 돌봐 주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첩이된 기녀는 가정의 일원으로 자리를 굳혀야 했던 것이다.
이경복, 1986, 앞의 책, pp.97~pp.109
3) 평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평민은 주로 娼妓들의 상대였다. 이들은 뭇여성들에게 질시를 받고, 남성들에게서는 도덕적으로 타락된 생활을 요구 당했다. 서민들이 娼妓를 얼마나 천하게 생각하였는지는 다음 일화에서 알 수 있다.
요역에 징발된 역졸이 하도 가난하여 끼니를 굶다시피 하며 일을 하고 있으니까 동료역졸들이 동정하여 한술밥을 모두 보태어 먹여주었는데 하루는 그 아내가 음식을 갖가지로 마련하여 "그동안 밥을 나눠준 가까운 여러분을 모시고 함께 들도록 하시라"고 권했다. 놀란 것은 남편이었다. 집에 값나갈 것은 하나도 없으니 무엇을 가지고 마련했는가 의아하여,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마련했는가? 몸을 파는 나쁜 일을 저질러서냐 또는 남의 것을 훔쳤는가?"하고 다그쳐 물었을 때 …(후략)
이 일화는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역졸과 그 부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기본적인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빈궁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매춘이나 절도를 상당히 천한 것으로, 해서는 안될 것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기녀를 천히 여기면서 적대감을 나타내기도 했는데, 고관대작의 玩弄物로서 도덕을 해치며 사회에 기생하고 있는 존재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특히 부녀자들에게 있어서는 원망의 대상으로 인식하였고, 그런 생각으로 기녀를 대우하였으니 자신들에게 해가 없어도 병충해 보듯 하였을 것이다.
이경복, 1986, 앞의 책, pp.109~pp.112
6. 맺음말
지금까지 기녀의 기원과 그 계층의 성립 요소, 그리고 기녀의 유형에 따른 모습을 살펴보고 기녀의 대상을 중심으로 한 기녀의 생활을 조망해보았다. 기녀의 기원에 관해서는 그 기원을 원화제도로 보는 견해, 무녀의 퇴락으로 보는 견해와 국가간 전쟁으로 인한 포로 및 노비에서 기원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존재한다. 이 가운데 노비 및 국가간 전쟁 포로로 인한 기녀의 기원에 대한 견해는 고려시대의 기녀층의 성립과도 연결지어 볼 수 있었다. 고려시대 기녀층의 성립을 살펴보면 국가간 전쟁으로 인해 노획된 포로들이 노비가 되고 그 안에서 기녀가 나오는 경우, 생활이 어렵거나 고리대 등을 통해 양인이 천인으로 전락하면서 노비가 되고, 그 가운데 色藝가 있는 여인들이 기녀가 되는 경우가 있었고 또 반역자나 범죄자의 처 가운데 官婢가 되었다가 기녀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和姦 등 그 자신의 형벌로 생기는 기녀층이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천자수모법과 일천즉천의 사회적 흐름을 통해 기녀가 세습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기녀의 유형은 그게 官妓와 私妓, 家妓로 나눌 수 있고 관기는 京城 지역에 있는 기녀와 地方妓로 나눌 수 있다. 한편 男妓도 기녀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출신성분이나 사회적 대우 등에서 妓女와 많은 차이를 보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기녀들은 전 남성을 상대하였고, 유형별로 보면 관기는 주로 왕과 사대부를, 私妓는 주로 평민을 상대함을 알 수 있었다. 기녀와 사대부의 혼인이나 일천즉천의 법칙을 통해 천인과 양인의 결혼을 막고 있지만, 그 안에서 보이는 것은 권세가 있는 경우에는 그러한 원칙을 피해가는 그러한 모습이었다. 또한 백성들의 경우 娼妓를 상당히 경멸하였으나 상대적으로 관기들은 왕과 상대할 경우 봉작을 받으며 그 가족들까지 권세를 누리는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녀에 대해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전통 예술의 보존자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사편찬위, 1972, 앞의 책, pp.278~pp.279
이자 구비문학의 전승자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고려 기녀제도가 조선시대에 그대로 계승된다는 측면에서 고려 기녀제도를 바라보기도 한다.
서병상, 1991, 앞의 책, p.153
그러나 기녀에 자체에 대해서 주목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을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만남과 헤어짐의 덧없음, 사랑을 한다 할지라도 수직적인 관계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적 비애를 지닌 기생들의 애환과 의식에 궁하지 않고 양반 부녀자들만이 입을 수 있는 비단옷과 노리개까지 찰 수 있다는 특권을 이야기하는 구절
김용숙, 1989, 앞의 책, pp.252~pp.253
이 눈에 확 띄었던 것은 그러한 이유였을 것이다.
고려시대 기녀에 관해 중점을 두고 나온 연구가 많지 않지만, 그나마 참고한 연구들도 완전히 다 반영하지 못한 것 같아서 많은 아쉽고 부끄럽다. 기녀에 관한 연구서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거의 모든 기록들이 집권자 중심, 남성 중심의 자료이기 때문인지 연구 자체도 기녀 층의 생활을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대상을 통해 외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었다. 물론 기생들이 남긴 시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들의 감정이나 느낌을 알아볼 수 있겠지만, 연구에 있어서도 그들을 이해하고 좀더 가깝게 느끼려는 태도와 접근방식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 참 고 문 헌 *
민족문화문고간행회, 1970, 『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5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사편찬위, 1972, 『한국여성사』, 이화여대 출판부
이능화, 1981, 『조선해어화사』, 民俗苑
李慶馥, 1985, 「고려시대 기녀의 유형고」, 『한국민속학』18
이경복, 1985, 『고려기녀 풍속과 문학의 연구』, 중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이경복, 1986, 『고려시대 기녀연구』, 민족문화문고간행회
김용숙, 1989, 『한국여속사』,민음사
서병상, 1991, 「女樂의 발달과 그 생활상」, 『曉星女大語文學硏究』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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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05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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