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혼인제도와 여성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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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언

Ⅱ. 혼인의 성립요건

Ⅲ. 혼인 형태와 그 영향
1. 혼인 후의 거주
2. 혼인 형태
3. 혼인 형태와 여성
4. 혼인 형태의 이면

Ⅳ. 간통의 개념과 처벌
1. 간통의 개념
2. 간통의 처벌

Ⅴ. 이혼과 재혼
1. 이혼
2. 재혼

Ⅵ. 결언

본문내용

로 수절하기를 원하 는 자는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여 상을 주십시오.
이 기록은 역설적으로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시대까지도 여성들의 재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이 기록은 일반 여성에 대한 재혼 금지규정이 아니고, 산기 이상의 처와 6품 이상 관리의 처만 재혼을 금지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규정이 시행됐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결국 고려시대에는 여성의 재혼을 법적으로 제한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시대 여성의 재혼은 이승장의 어머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박용운, 2002, 위의 책. p.347
고려 중기 의종∼명종 때의 인물인 이승장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자 어린 이승장을 데리고 재혼하였다. 그런데 새 남편이 가난하다며 이승장에게 공부가 아니라 일을 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이 이전 남편의 길을 따라야 한다며 기어코 공부를 시켜 과거에 급제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자식까지 데리고 재혼을 할 수 있었다. 이 경우 자식의 입장에서 계부를 '의부(義父)'라 하고, 계부의 입장에서 그 자식을 '의자(義子)'라 하였는데, 이러한 용어의 사용은 재혼이 일반화 된 당시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Ⅵ. 결 언
이상으로 고려시대의 혼인제도를 혼인의 성립요건과, 형태, 그리고 간통과 이혼·재혼을 통해 살펴보았다.
고려시대의 혼인은 그 시기와 의식에 있어 특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양가의 대등한 경제적 조건이 전제된다는 특징을 가진다. 절차에 있어서는 반드시 중매를 통해야만 했다는 견해와 당사자의 자유 의사가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자유혼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더라도 양가의 경제적 조건이 전제가 되는 혼인 형태에서 자유혼의 빈도는 그리 높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려시대의 혼인 형태는 '서류부가혼( 留婦家婚)'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은 고대부터 내려온 혼인 풍습으로서, 고려사회의 '양측적 친속제도'의 영향으로 인해 고려의 혼인 풍습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고려의 모든 혼인 형태가 이와 같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서류부가혼'은 고려의 혼인제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고려가 부계중심적 사회가 아니었다는 맥락과 함께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고려는 일부일처제의 사회였으며, 이것은 가족 내에서 어느 정도의 여성의 지위를 확보하게 해주는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여성들에게 좋은 점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간통 개념에 있어서 고려는 다소 보수적인 모습을 보인다. 결혼한 사람들에게만 간통률을 적용하는 요즘과 달리, 고려시대는 혼인 이외의 모든 성관계를 간통으로 간주하여 처벌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간통에 대한 처벌은 간통자 사이의 관계나 신분 등에 따라 각기 다르게 적용되었고, 특히 남녀간의 처벌에 있어 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혼과 재혼에 있어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이혼은 주로 남편에 의해 요구되었지만, 부인이 이혼을 요구하는 특수한 경우가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법적으로는 한쪽에 의한 일방적인 이혼을 금지했지만, 법과 현실의 틈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법적으로 재혼을 금지하지 않았으며, '의부(義父)'와 '의자(義子)'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고려의 혼인제도을 통해 보여지는 고려 여성의 모습은 매우 이색적이다. 고려의 여성들은 가족 내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조선의 여성들과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선 '서류부가혼'이라는 그 자체가 여성의 지위를 보장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일부일처제의 모습은 현재의 우리 모습과 다르지 않았으며,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받고, 부모님을 봉양할 수 있었으며, 여성이 호주가 될 수 있었던 점까지 따진다면 조선의 여성들은 물론 현재의 여성들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려시대 여성들에게도 아픔은 존재했다. '서류부가혼'은 고려시대 혼인제도의 특징이자 그 자체가 여성의 지위를 보장해주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여성들에게 어느 정도의 경제적 능력을 부담케 했다. 결국 그렇지 못한 여성들이 결혼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이혼에 있어 여성이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고 하나 거의 대부분은 남성에 의해 이혼이 요구되었고, 여기에 처가의 영향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사회적 분위기까지 겹쳐 여성들은 하루아침에 버림받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간통의 처벌에 있어서도 남자 종과 여주인의 관계에만 처벌하였고, 여성은 남편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처벌을 달리한 반면 남성은 부인의 존재가 문제가 되지 않는 등의 차별이 존재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의 여성들은 성적으로 자유롭지 못했다. 또한 외가의 계통으로도 음서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하나, 결국 음서로 인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었다는 점은 고려시대의 여성의 지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종합해볼 때, 혼인제도를 통해 알아본 고려시대의 여성은 분명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조선시대의 여성에 비해 높은 지위와 역할을 소유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분명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매우 제한적인 부분에 그치고 있어, 궁극적으로는 남성에 의한 사회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참 고 문 헌 ■
한국 역사연구회, 1997,「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 :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청년사』
역사문제연구소, 1999, 「(사회사로 보는) 우리 역사의 7가지 풍경」『역사비평사』
李培鎔, 1999,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 : 고대부터 조선시기까지」『청년사』
김경훈, 2000, 「우리 풍속 엿보기 : 상상밖의 역사」『오늘의 책』
박용운, 2002, 「고려시대 사람들 이야기. 2 : 경제 사회생활」『신서원』
權純馨, 1995, 『고려 혼인제 연구의 동향과 과제』 이화사학연구
權純馨, 1995, 『고려시대 혼인제도에 대한 일 연구 - 이혼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사학회, 이대사원
權純馨, 1997, 『高麗時代 婚姻制度 연구』 梨花女大 大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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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05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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