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개국공신 왕규 분석 개혁 주창한 濟世의 경륜가인가, 왕위 찬탈 노린 권력욕의 화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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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 서울로 와 숙위하여 왕규가 감히 반역 행동을 못하게 하였다. 이에 왕규를 갑곶으로 추방하고 뒤로 사람을 파견하여 목을 베었으며 그의 도당 300여명도 처단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혜종이 죽고 정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왕규가 왕명을 위조해 박술희를 죽이고, 왕규가 난을 일으키려 하자 서경군이 와서 감히 반란을 못하게 하였으며, 왕규를 갑곶으로 추방한 후 300인을 처형하였다는 순서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진행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앞뒤가 뒤바뀌어 도저히 요령이 없다. 특히 박술희를 살해한 허물을 왕규에게 뒤집어씌우려는 듯한 혐의가 짙다. 우리가 이 말을 약간 바꾸어 보자.
‘(정종은) 혜종이 죽자 왕식렴의 서경군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먼저 박술희를 죽이고 이어 왕규와 그 무리도 죽였다.’
이렇게 배열할 때의 정황이 훨씬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박술희와 왕규를 제거한 것은 정종과 왕식렴이며, 따라서 왕규의 난이 아니라 정종의 쿠데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지금까지 앞에서 제기한 의문들을 통하여 혜종의 죽음과 왕규의 난이라는 것이 그리 명확하게 똑떨어지는 상황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알려진 왕규에 대해서도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왕규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들은 정확한가.
왕규의 사상과 정치적 지향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단지 그가 취했던 행동과 주변정황을 통해 짐작해 볼 뿐이다.
먼저 과연 왕규는 북진정책을 추진하고 북방 개척을 통해 대고구려의 꿈을 실현하려는 야심이 있었던 인물인가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당시의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는 왕규라는 인물을 그렇게 해석하려고 모색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결코 긍정적이지 못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구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려는 북방개척의 전진기지는 서경이었다. 태조는 자신의 본향인 개경이 전국에서 모여든 호족들로 메워지자 가장 충실한 군사력을 서경에 집결시켰다.
폐허로 남아 있던 옛 고구려의 도읍지에 사람들을 옮겨 만든 서경은 북진을 향한 고려의 의지와 고구려의 후예라는 자부심으로 새롭게 건설된 도시였다. 그 북진정책의 책임을 담당했던 사람은 태조의 조카인 왕식렴이다.
그러나 왕규는 서경의 왕식렴과 대립했던 인물인 것이다. 왕규가 제거하려 했던 정종은 왕식렴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후 서경으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오히려 북진정책은 왕규와 대립적인 세력들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꿈과 이상이 같았다면 그들은 대립이 아니라 서로 협조했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왕규에게서 북방 개척의 이상을 찾는 것은 지나친 추측이 아닐까 한다.
다음으로 또 하나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왕규가 국가 건설의 기초를 담당한 제세의 경륜가는 아니었을까. 혹시 정종과 광종이 왕위에 오른 후 반대세력이었던 왕규를 반역자로 처단하고 모든 죄악을 뒤집어씌운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왕규란 단지 권력의 희생자로서 역사에 오명을 뒤집어쓴 인물일 수 있다.
조선이 건국하였을 때의 정치적 진행과정과 고려 초기는 서로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 권력의 재편이 생겨날 때 그 권력을 누가 담당하게 되느냐에 따라 입장이 갈라진다. 조선 초기 정도전이 태종 이방원에게 제거되었듯 왕규 역시 광종에 의해 제거된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왕권의 확립을 위해 숙청을 단행했던 태종 이방원에 대해 정도전은 신권을 대표하는 방해물이었던 것이다. 국가를 건설하는 데 주역을 담당했지만, 건설된 국가에서 왕권의 확립을 위해서는 희생되지 않을 수 없었던 인물이 정도전이었다.
왕규와 정도전을 비교하는 것은 가능할까.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왕규의 난에 대한 ‘고려사’의 기술은 모순되고 불명확한 것이었다. 의혹의 여지는 충분한 셈이다.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꿈과 이상이 모이고 모여 큰 흐름을 이룰 때 가능한 것이다. 고려가 건국하고 후삼국의 통일을 이룩하였던 기간은 한국사의 거대한 변화를 가져온 전환기의 시대로 인식되고 있다.
신라라는 고대적 체제를 벗어나 중세사회로 이행해 가는 소용돌이와 격랑 속에서 변화와 새 사회의 건설을 꿈꾸던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모여 도도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혹시 왕규 또한 그 큰 흐름의 한 줄기는 아니었을까. 왕규 또한 전환기의 한 시점에서 건국 초기의 국가와 정치를 이끌었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역사상의 어떤 기록을 통해서도 그의 사상이나 이념을 구체적으로 밝혀낼 수는 없다.
그가 꿈꾸던 사회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미 정상의 위치에 도달했던 그가 무엇을 위해 그렇게 더 큰 권력이 필요했던 것일까. 단순한 권력에의 욕구와 생존경쟁 탓이었을까, 아니면 무언가 목숨을 걸고라도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결론을 얻기는 쉽지 않다. 왕규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역사학의 영역에서 벗어나 상상력의 영역에 맡겨야 할 문제다.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 복원할 수 있는 왕규라는 인물은 권력을 추구하여 반역을 꾀하다 몰락한 패배자의 형상일 뿐이다.
왕규의 전기는 반역열전에 실려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분통이 터지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것은 맞는 말이다. 역사의 눈길은 패자에게 관심을 던질 만큼 한가하지 못하다. 아무리 승자라 하더라도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무대의 중앙에 서 있는 그 순간뿐이다.
불행히도 역사가 조명을 비춘 그 시간에 왕규는 반역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왕규를 반역자로 기억한다. 누군가 왕규를 반역자가 아닌,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 깔린 위대한 정신 혹은 이루지 못한 꿈과 이상을 간직한 채 구렁텅이로 떨어져 반역자의 낙인을 쓰고 만 절세의 경륜가로 이해하고 싶다면 필자 역시 그러고 싶다. 필자는 역사상의 모든 지도자들이 다 그랬기를 강하게 바란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의 기록과 기록 사이의 그 넓고 공허한 공간에 장엄하고 아름다운 상상력의 성채를 세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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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4.10.01
  • 저작시기2004.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8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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