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의미의 변이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문제의 소재
2. 성리학자들의 실학
1) 性理學 受容期의 실학
2) 性理學 滿開期의 실학
3) 禮學的 性理學의 실학
3. 탈성리학자의 실학
1) 經世致用의 실학
2) 利用厚生의 실학
3) 조선 후기 실학의 大成
4. 두 실학의 차이

본문내용

任事, 未見安穩區處, 使之敎人, 不能開 修理, 名雖學問, 罔昧事務措 , 亦鮮補益於人."
"천하의 학문의 是非를 통괄하여 우열을 논하여 정하려면, 천하의 민생에 실제로 쓰여지는 것과 四海의 정치에 필요한 것으로써 해야 한다. 형체가 있어서 집행할 수 있고, 사물을 처리하여 중험할 수 있는 것이 실학이다."
) 崔漢綺,《氣學》卷 1. "統天下學問是非, 論定優劣, 以天下民生所實用, 四海政治所必由, 有形可執, 處物可驗, 爲實學.……"
인간의 현실 생활(人世)에 관련된 일을 그는 '事務'로 표현하면서, 그 事務가 곧 학문의 대상이라고 한다. 事務와 무관한 학문이라면, 그것은 '虛無悟誕之學' 또는 '懸空底學'일 뿐이다. 이렇듯 중요시 해야 할 학문 대상인 事務는 구체적으로 지적한다면, 朴趾源이 지적한 士農工商에 兵事를 더한 것이다. 이것이 대표적인 事務이다. 그러므로 學問의 優劣은 대표적 事務인 士農工商兵 등에 관한 연구(實跡)가 실제 行事에서 실시 시행(措施)되어 얻어진 결과에 따라 판별된다. 이는 그 결과가 생활에 유익하면 우수한 것이고 무익하면 열등한 학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學問으로서의 實學이란 "온 天下의 民生에 대한 實用性과 그(四海) 政治의 根據(來源)가 有形하게 파악되고, 實物處理로써 (有益함이) 증험될 수 있는 것"이다. 崔漢綺가 工具·機器의 제작과 門戶開放에 의한 東西交易 등을 주장하였음을 고려하면, '天下民生' '四海政治'의 표현을 동원한 그의 이 實學觀은 安人의 平天下的 極大化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두 實學의 差異
이와 같이 살피면 性理學과 脫性理學(朝鮮後期實學)에서 다 實學임을 자칭하였지만, 양측이 사용한 '實學'의 의미에는 큰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우선 性理學이 虛學으로 지목한 比較 對象은 佛敎와 訓 ·詞章儒學, 특히 佛敎였지만, 脫性理學의 比較 對象은 性理學的 弊端과 性理學 自體이다. 이와 같이 虛學視하여 비교·극복의 대상으로 택한 상대가 兩者의 경우 서로 다름으로 인하여, 兩者가 사용한 實學의 의미가 서로 다르게 되었다. 性理學은 訓 ·詞章儒學과 佛敎를 비교·극복의 상대로 택하였던 까닭에, 한편으로는 誠敬에 의한 修己와 다른 편으로는 禮·五倫 등에 의한 齊家 治國 능력의 우월의 의미로 實學을 자칭하였다. 그러나 脫性理學은 性理學을 비교·극복의 상대로 생각하였던 까닭에, 性理學에 비하여 經世 利用에 의한 民人의 厚生 강구 능력의 우월의 의미로 實學을 호칭하였다.
뿐만 아니라 性理學과 脫性理學을 각각 성립시킴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方法을 구사하였다. 兩者가 자칭한 實學 의미의 차이는 兩者의 方法論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性理學에서는 訓 ·詞章學과 佛敎에 대처하고 극복하기 위하여, 원래 唐末·宋初 유학 전래의 誠敬 등 修己의 철저화(爲己之學化), 禮와 人倫 및 齊家 治國의 강조, 性命 義理 등에 대한 形而上學的 탐구를 그 方法으로 구사하였다. 朝鮮時代 후기로 올수록 이러한 性理學의 특징들이 비실제적인 폐단으로까지 현저하여졌던 사실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 현상들은 性理學에 본래부터 있던 특징들의 露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脫性理學에서는 원래 性理學의 토양에서 그 현실적 취약성의 보강 의식을 가지고 發芽한 까닭에, 經世·利用 측면의 범위 확대와 내실의 강화를 위한 方法들을 구사하였다. 즉 博學, 原初儒學 본연의 實際性 추구 정신의 회복 및 實事求是 등 實證의 方法이 그러한 것이다.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두 實學 의미(내용) 차이의 발생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性理學과 脫性理學이 기여하려 하였던 '歷史的인 時代環境'의 相異이다. 前者의 實學觀은 佛敎와 訓 ·詞章學이 각각 國敎와 當時의 儒學이었던 高麗에서 朝鮮에로 교체되는 轉換期의 思想的 反省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後者의 實學觀은 16∼17세기를 고비로 하여 발발한 倭亂 胡亂 및 西歐의 近代科學技術이 知入되는 상황에서 일어난 思想的 省察이 작용한 것이다.
이 점은 조선 중기(17세기) 이후 性理學과 脫性理學의 특징이 대조적으로 형성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원래 17세기 특히 兩亂으로 인하여, 朝鮮朝 사회 전체가 극심하게 질곡을 헤매고 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守舊(保守)와 改革(進步)이었다. 당시 집권층은 통치원리였던 性理學에 의지하면서 前者를 택하였다. 따라서 性理學은 禮 위주의 개발에 의한 社會安定을 도모하는 것으로 그 實際的 實用性을 발휘한 셈이고, 그런 의미에서 實學임을 자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淸과 倭 등 외국의 사정, 특히 西歐의 근대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도 어느 정도 섭취한 데다가 양란으로 더욱 피폐된 성리학 풍토에 불만이었음은 물론 비판 의식을 지닌 學者가 많았던 脫性理學者들은 그들의 비판정신에 기초하여 改革의 길을 택하였다. 따라서 脫性理學者들은 經世致用과 利用厚生에 치중하여, 塗炭에 빠진 民生의 구제에 기여함으로써, 또한 그 학문의 實際的 實用性을 발휘하려 하였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改革案 등의 사상으로써 實學임을 자칭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물론 脫性理學의 경향을 지닌 학자들 중에도 李瀷과 丁若鏞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禮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여 그 방면의 업적까지 많이 이룩한 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性理學의 궤도에 섰던 禮學者들이 禮絶對視 사고를 견지하면서 禮補强에 진력하였음에 비하여, 이들은 禮相對視 사고를 견지하고서 기존의 私禮.邦禮 등의 改定에 진력하였다. 따라서 다 禮를 중요시하면서 그것들을 연구하였어도 양자의 禮에 대한 사고와 태도가 달랐음에 유의해야 한다.
論者는 本 考察에서 주로 實學 용어의 해명에만 머문 까닭에, 性理學과 脫性理學의 思想內容의 차이는 아직 다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조금씩 드러난 것만을 상기하더라도, 性理學에서는 五倫과 禮(禮義·禮節·制度·法 등) 등이 특별히 강조된 데 비하여, 脫性理學에서는 四民平等, 奴婢制의 改革, 工具·機器의 製作, 貨幣의 流通, 市場經濟의 擴大 및 東西文物의 交易이 언급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前者에는 대체로 前近代(中世) 思想의 성격이 보다 강한데 비하여, 後者에는 近代的 思想의 성향이 싹트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4.10.01
  • 저작시기2004.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903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