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 왕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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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중국역사 왕안석] 격화하는 재정위기
왕안석의 신법
왕안석 개혁의 좌절

본문내용

서의 등용도 엄격히 제한했다. 나아가 당인(黨人, 구법당 인사)들의 문장을 불살라 일체 이 세상에 남기지 않게 할 정도로탄압은 철저했다.
휘종시대에는 신법 덕분에 재정이 풍요로워져서 정부에 상당한 잉여금이 있었다. 휘종은 이 자금을 사용하여 마음껏 유흥에 탐닉했다. 휘종에게 도락을 권하는 한편 또 그 좋은 상대자이기도 했던 자는 역시 채경이었다. 휘종은 시문에 뛰어났으며 붓글씨와 그림 또한 당대 일류라는 풍류천자(風流天子)였다. 휘종은 전국으로부터 명인들의 서화와 골동품들을 수집하고 궁정의 화원(畵院)에저명한 화가들을 집결시키는 등 예술을 장려했다. 미술사에서는 이 시기를 그 연호를 따서 선화시대(宣和時代)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송대뿐만 아니라 중국 전근대를 통해 최고의 미술 황금시대였다.
휘종은 또 장려한 궁전과 도관(道觀) 정원 등을 조영하여 밤낮으로 유흥에 몰두하며 . 왕안석
의 신법은 원래 민생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이 무렵이 되면 신법이 인민수탈의 도구로 변질되었 다. 모역법은 민중으로부터 면역전을 징수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는 그 부담이 신종 때보다 70배나 증가하기도 했다.
청묘법의 자금이 되어야 하는 상평창의 자본은 황제의 유흥비로 전용되었다.
특히 인민을 괴롭혀 원성을 산 것은 화석강(花石綱)이었다. 채경은 진귀한 꽃과 나무들을 좋아했던 휘종의 뜻에 영합하여 소주(蘇州:강소성 소재)의 대지주 주면(朱면 ) 부자에게 명하여 강남지방으로부터 진귀한 나무와 수석들을 헌상시키도록 했다. 처음에는 소량이었지만 해마다 헌상물이 증가하여 나무와 수석을 운반하는 선단이 대운하를 가득 메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화초와 기이한 석재 및 수석들을 운반하는 선단이란 의미에서 이를 화석강이라 불렀다. 이 선단들이 대운하를 차지했기 때문에 수도에 이르는 물자 수송이 불가능해져 물자가 정체되었으므로 경제계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으며 수도에 있는 군대의 봉급도 체불되었다. 또한 천자가 사용한다는 명목하에 강제로 민가의 목석(木石)을 징발하였으며 게다가 운반 비용은 인민의 부담이었으므로 강남 민중들은 몹시 고통을 받았다. 가난한 백성들은 자식을 팔아 그 비용에 충당했을 정도였다.
북송의 말로
휘종시대를 통해 문화는 난숙한 경지에 달하여 일견 화려해 보였다. 하지만 그 내실은 유흥에 탐닉하여 정치에 어두운 황제와 이를 기화로 하여 전권을 휘두르는 간신들에 의해 정치는 부패해져 있었다.
그리하여 휘종의 치세 20년 사이에 송조는 이윽고 손을 댈 수조차 업는 중병에 빠져 들었다. 인민은 생활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여기저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강남에서는 방납(方臘;?∼1121))이, 화북에서는 송강(宋江) 등이 예술의 황금시대였던 선화시대와 때를 같이하여 봉기했다.
방납은 선화 2년(1120) 10월에 목주(睦州:절강성 소재) 청계현(靑溪縣)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역사서에 의하면 방납은 이 땅에서 칠원(漆園)을 경영하는 중류가정 출신이었다고 하지만, 1970년대에 발견된 방씨의 족보에 의하면 그는 인근 휘주(徽州:안휘성 소재)로부터 이주하여 방씨 가문에 고용된 고용인이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청계현이란 지역은 산이 많고 경지가 적어 식량자급이 불가능한 가난한 고장이었는데 당말 이래의 개발로 임업과 양잠업 등이 성행하여 그 교역에 의해 부를 얻고 있었다.
그렇지만 화석강이 시작되어 정부의 탐욕스런 가렴주구를 받게 되자 그 악영향을 가장 심하게 받게 된 곳은 목주와 같이 농업이 빈약한 산촌이었다.
방납은 부근의 무뢰배들을 모아 선동하여 "주면을 죽이자"라는 슬로건을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스스로 성공(聖公)이라 칭하며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세우고 문무의 관료들을 임명하였으며 6등의 계급을 두어 집단을 통솔했다. 방납이 궐기하자 강남일대의 군도(群盜)와 빈민들이 이에 호응해 왔다. 그리하여 급속히 그 세력이 커져 수일만에 1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반란군은 관리와 부호를 살해하고 관청을 습격하여 점거하였으며 순식간에 절강·강서·안휘 일대에 걸친 6주 52현을 점령했다. 이윽고 강남의 중심도시인 항주도 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북송 정부에 있어 경제적 근거지라 할 수 있는 강남이 반란에 휩싸이고 항주도 공략되었다는 사실에 접한 송조는 당황하여 황급히 조치를 취했다. 조정은 금과 연합하여 요조 토벌에 나서고 있던 환관 동관(童貫;?∼1126) 휘하의 정예군과 화북의 군대를 합한 15만 대군을 강남으로 급파했다. 또 민중들의 정부에 대한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화석강을 일시 정지한다는 조칙을 발포했다. 정부의 대군 앞에 위세 높던 방납도 다음해 4월 그의 본거지에까지 쫓긴 끝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 잔당은 험준한 산골짜기를 거점으로 삼아 이후에도 게릴라전으로 저항했다. 이 반란이 완전히 평정된 것은 선화 4년(1122)년 3월이 되어서였다.
횡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관군 수만명이 파견되어서도 맞서기가 힘들 정도였는데 최후에는 마침내 해주(海州:산동성 소재)에서 관군에게 투항했다. 이 반란을 소재로 한 유명한 소설 {수호전}에서는 송강 등이 그 후 동관휘하에서 방납정벌에 종군하여 커다란 공적을 세우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남송대에 쓰여진 역사서에도 그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송강이 항복한 것은 방납토벌의 이후이며 그는 방납정벌에 출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동관의 부하에도 송강(宋江)이란 이름을 지닌 자가 있었지만 그는 양산박의 송강과는 다른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1965년 가을 이래 {수호전} 비판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종래 농민봉기의 영웅과 같이 인식되어 왔던 소설의 주인공 송강 등에 대해, 이들이 탐관오리에 반대했을 뿐 황제에게는 반대하지 않았으며, 마지막에 정부군에 투항하여 송조의 황제를 도와 방납이 이끄는 농민봉기군을 탄압한 투항주의자라고 비판했다. 따라서 그들은 수정주의 내지 개량주의를 추진한 존재였다는 식으로 그 평가가 완전히 변화되었다. 그와 같은 평가가 가능하다면 역사적 실체로서의 송강과 소설의 송강은 더욱 상이한 이미지를 지닌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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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4.10.01
  • 저작시기2004.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9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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