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의 신법과 개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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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왕안석의 생애과 사상

2. 당대의 시대적 배경

3. 왕안석의 균역법

4. 왕안석의 청묘법

5. 왕안석의 묘역법

6. 왕안석의 삼사법

7. 보갑법과 보마법

8. 구법당과의 대립양상

9. 신법의 부활

10. 결론

11. 참고자료

본문내용

불어 가까이 모시는 환관 등으로부터 부친시대의 고사를 듣고 조모 태황태후의 정치방침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철종이 18세 때 조모 태후가 62세로 죽고 선인황후란 시호를 받았다. 구법당에게는 지팡이며 기둥으로 의지하는 바 되어 여인중의 여인이라는 칭송을 받았지만 실은 성 잘내는 여성으로 구법당에게 이용되어 송의 정치를 필요이상으로 혼미상태에 빠뜨렸다. 중국의 역사에는 이러한 여성이 자주 등장한다. 이 조모 태후의 죽음에 의해 다음에는 신법당의 반격이 있어 당쟁은 정권의 교체 때마다 더욱 치열해져 갔다.
왕안석이 사망한 시점에는 신법당이 구법당에게 권좌를 내주었다고는 하나 양파의 적대감정은 그토록 첨예화하지는 않았다. 왕안석이 문공이란 시호를 받은 것은 이때 구법당의 정부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문이란 한자의 시호는 신하의 시호로서 지고 최상의 것이었고 두자의 시호 문정이 그 다음이다. 왕안석의 뒤를 따라 사망한 사마광의 시호가 문공이어서 구법당 정부조차도 사마광은 왕안석만 못함을 시인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후 차츰 당쟁이 격화됨에 따라 2인의 평가는 몇 번이나 역전하는 것이다.
일단 평가가 확정된 것은 남송시대에 들어간 뒤부터인데 사마광은 성심성의의 인격자, 왕안석은 편견독단에 찬 괴퍅한 자라는 것이 세평이 되었다. 이것이 거의 영구적으로 확정된 결론인것에 들어가 고증학이 성행되었을 때 고증학자 제상웅이 왕형공년제고략을 저술하여 왕안석이 종래 불확실한 사료에 의해 그릇된 인간상으로 변형되어 왔음을 실증했다. 다시 청조 말기에 왕형공전을 수록하고 보완하니 이것이 세간에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이에 의하면 왕안석은 중국 역사상 제일급 인물이고 이에 반해 종래 인격자로 지목되어 온 구법당의 정치가는 타인의 재능을 질투하는 소인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의 평가는 대개 이를 답습하여 오늘날 중국에서도 왕안석의 평판은 높은 것 같다.
9. 신법의 부활
철종이 친정하자 그때까지의 年號원우를 결성이라 고쳤다. 원우는 구법당적인 어감을 주는 글자이니 원우의 우는 인종 최후의 연호인 희우의 우였다. 구법당은 그 정치를 인종시대로 복귀시킨다는 구호를 내걸었으므로 그래서 연호를 원우라고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철종 친정시의 정치는 부친 신종의 정치의 부활이었으므로 신조의 성덕을 결술한다는 의미로 연호를 결성이라 했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여지껏 구법에 집착하고 있던 소침, 순인 등이 추방되고 신법당의 장정, 제재 등이 복귀했다. 장정의 동료었던 제촉은 앞서 선인태후의 미움을 받아 죄를 입고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병사했었다. 그래서 신정부는 왕안석의 정치를 부활시킴과 더불어 구법당 시대에 박해받은 동료를 위해 보복을 꾀하였다.
구법당 시대에 구법당 대신들이 선인태후에게 올린 상소는 그대로 궁중에 보존되어 있었다. 이제 신법당의 정치가들은 이 문서를 모조리 압수하고 이를 저자별로 분류하여 여기다 편유장유라 이름 붙였다. 이를 보면 구법당시대세 누가 무엇을 했던가 일목요연하였다. 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레 의하여 각자의 언동를 조사하고 처벌앴으므로 한 사람도 모면할 수가 없었다 생존해 있던 소침 등은 물론이지만 이미 죽은 사마광, 여공저등도 소급, 처벌당해 영전이 취소되었다. 이 편류장유는 오늘날 남아 있지 않지만 다행히 그 중요 부분이 남송 이수의 속자치통감장편에 인용되어 있으므로 이 부분을 읽으면 대단해 흥미롭다. 이 책은 북송 1대의 완비된 편년체역사인데 애석한 것은 왕안석이 활약한 시대 부분만 빠진 점이다. 그러나 이를 보면 정치의 동향를 세무까지 알 수 있으므로 단순해 유익할 뿐 아니라 흥미진진한 역사서이다. 이에 비하면 송사는 완전히 무미건조한 사료의 기계적 나열이어서 전혀 재미가 없다. 그러나 송사가 재미없다고 하여 송대의 역사까지 재미없게 생각해버릴 필요는 추호도 없다. 물론 속자치통감장편일지라도 사료의 집적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을 일관된 통사로서 읽게 된 다음부터 송대사 연구는 진보하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10. 결론
송 이후 과거를 기반으로 한 중국관료제는 세계사상 전근대 관료제 사회에서 이룩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합리화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약점을 안고 있었다. 법제상의 신분제 붕괴와 사회계층이동의 확대에 따라 관료제가 이념적으로는 만인의 능력에 개방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주로 지주제 및 전제국가에 의거한 유교적 교양관료로서 근대국가의 전문적 직업관료가 되지는 못했다. 특히 유교적 합리주의로도 더 이상 순화될 수 없는 독재적 황제권력에 의해 관료기구는 왕조의 안전을 위한 정교하기 짝이 없는 견제, 감시 구조에 제약되어 사대부 관료의 책임정치가 불가능하고 관료의 박봉과 자의적 조세수취라는 관행 속에 제도적인 부패가능성이 잠재하고 있었으며 왕조권력의 안전을 위한 지방관의 임기제, 본적지 부임회피제로 인해 세습적인 토착 진사의 실무행정이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인종은 재위 40여 년에 이르고 (1023~1063년) 그 말년은 송초로부터 헤아려 약 100년이 된다. 이 백년간 요의 침입이나 서하와의 전쟁이 있었지만 그것은 국지적 소란에 그치고 대국적으로는 대체로 평화가 지배적이었다. 이처럼 백년간이나 태평무사한 시대는 종래의 역사에도 별로 선례가 없는 것이었다. 영종은 재위 4년,36세로 죽고 태자였던 신종이 뒤를 이었다. 당시 나이 20세 다음해 개원하여 희녕 원년으로 했다. 당시 신종은 인심을 일신하기 위해 독자적 입장에서 인사를 행하여 정치의 침체를 타파하고자 했다. 왕안석은 이에 정치, 경제, 문화 등에서 관념적이 아닌 실제적 대안으로써 신법을 내세웠다. 그의 신법은 합리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지녔다. 다방면으로 부패해 있던 당시의 집권층과 지주층에 의해, 그들의 이해관계와 부합되지 아니함으로 인해서 결국은 좌절된다. 신법은 송의 중흥을 꾀하고자 했으나 송대의 보수적인 세력과의 마찰에 의해 완벽하게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의 실패로 말미암아 송은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11. 참고자료
미야자키 이치사다, 중국사, 역민사
제임스류 저, 왕안석과 개혁사상, 지식산업사
신채식, 「왕안석 개혁의 성격검토」,『동양사학연구』51, 동양사학회
  • 가격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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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1.18
  • 저작시기2008.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7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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