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어업에 대한 연구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머리말

1. 조선전기 어업의 상황

2. 바다어업의 확대와 어선어업의 발달
1) 바다어업의 확대
2) 어선어업의 발달
3) 많이 잡힌 어류

3. 주요 어장의 형성과 대규모 어업의 발달
1) 주요 어장의 형성
2) 대규모 어업의 발달

맺음말

본문내용

『備』 158책 正祖 元年 5月 16日
18세기 중엽에 쌀 1석이 7냥이었던 점을 참작하여 조 390석을 쌀 195석으로 계산하고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1,365량이 된다. 그러므로 방렴이나 어조를 설치하는데 1개당 평균 600량 정도의 비용이 들었던 셈이다. 즉 방렴과 어조를 설치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많았고,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많은 재원을 끌어들어야 했던 것이다. 함경도에서도 방렴 1곳을 설치하는데 수백천을 내려가지 않았고, 방렴 어업을 경영하는 사람은 멀리서 온 무뢰배들이었고 이들은 빚을 내어 방렴을 설치하였다.
) 『正祖實錄』 卷16 正祖 7年 11月 丁酉
19세기 중선망 어업은 어선과 어망의 규모가 컸고, 종사하는 어부의 수도 많았다. 당시 배의 크기도 매우 컸다. 천석 이상을 싣을 수 있는 배도 있어서 조운에 이용되기도 하였고,
) 『備』 101책 英祖 13年 3月 12日
그와 비슷한 크기의 배가 어업에 활용되기도 하였다. 『임원경제지』에는 중선망의 제작방법과 사용방법이 기술되어 있는데, 그 규모가 자루그물은 길이가 45파였고, 그물 입구의 둘레가 48파였다. 길이가 45파라면 약 68m이고, 입구 둘레가 48파라면 그물 입구의 지름이 약 23m에 달하였다. 이 어업은 부호가 1천 냥을 들여 배를 건조하고 그물을 떠서 고기를 잡는데 어획량이 많아 큰 돈을 번다고 하였다. 후릿그물에도 규모가 큰 것이 있었다. 그물의 길이가 수십 자가 되고 너비가 수백 파에 이르러 많은 물고기를 잡았으며 부호는 그물을 명주실로 만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 『林園經濟志』 佃漁志 권3 獵 網
수백 미터나 되는 후릿그물을 만들어 고기를 어로를 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경영은 원근의 무뢰배가 빚을 내어 경영을 하거나, 인근의 부호들이 돈을 내어 경영하는 형태였고, 이들은 농민층분해현상으로 신분과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스러운 노동자를 고용하여 어업을 경영하는 초기적인 형태를 띠어 갔다.
맺음말
조선전기에는 내수면어업에서 바다어업으로 확대되어 간 시기였지만, 여전히 내수면어업이 일정한 비중으로 행해지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어전도 바다에 설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에도 많이 설치되어 은어 붕어 잉어 등의 민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어업이 발달하면서 바다어업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연안어업이 발달하면서 어업을 하는 무대가 확대되었다. 정치망(定置網)인 어전뿐만 아니라 어장 및 어조 어기 등이 개발되면서 어업의 장이 크게 확대되었다. 연안어업이 자리잡게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주요 어장이 형성되었다. 어민들은 배에다 어망을 싣고서 바다에 멀리 나가 고기를 잡게 되었다.
또한 조선후기에는 어로의 기술이 발달하였다. 밤에 불빛을 밝혀 고기를 유인하여 잡는다든지, 배에 어망을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설치하여 고기를 잡았다. 어망의 재료도 전에는 볏짚이나 칡 등이었는데, 면이나 명주실을 원료로 함으로써 어망이 튼튼해졌다. 어망을 짜는 기술도 발달하여 어망이 정교하면서 튼튼해졌다. 또한 조선후기에는 배를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고, 민간조선업이 활발해지면서 어선도 크게 증가하였다.
어선이 크게 증가하고, 어망도 튼튼이 만들어져 고기떼가 몰려오는 시기에 어장에 가면 한번에 많은 고기를 잡아 배에 싣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다. 이렇게 잡은 고기는 소금에 절여 젓으로 만들거나, 말려 포로 만듦으로서 오래 저장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유통로의 발달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등으로 전국에 유통될 수 있었다.
당시에 가장 많이 잡히면서 많이 소비된 고기는 조기, 명태, 청어, 멸치, 대구 등이었다. 이 고기떼가 몰려올 때는 몇 리에 걸쳐서 수억 마리가 몰려왔으며, 그때 어장에서는 수십 수백 척의 어선이 몰려들어 배에 가득 실을 정도로 잡아 말리거나 소금에 절여 젓으로 만들어 전국적으로 유통되어서 전국의 민들이 모두 소비할 정도였다.
조선후기에는 연안어업이 발달하면서 전국적으로 각 해안별로 주요 어장이 형성되었다. 서해안은 퇴적해안으로 갯벌이 발달하고, 간사지가 발달한 해안으로 조수간만의 차가 컸다. 전라도의 영광 법성포와 위도를 중심으로 칠산바다는 가장 큰 어장이었고, 그곳에서는 조기와 청어 등이 많이 잡혔다. 충청도는 태안 보령 등에서 청어와 조기가 많이 잡혔고, 경기도에서는 인천 강화 등을 중심으로 어장이 형성되면서 조기 등이 많이 잡혔다. 황해도의 연평도와 강령·안악 등지에서는 조기가 많이 잡혔고, 평안도의 중화 정주도 어장과 어전이 발달하고 있었다.
동해안은 융기해안으로 갯벌이 발달하지 않았지만, 난류와 한류가 합쳐져 어족이 풍부한 해안이었다. 지세에 단락이 없어서 지인망 어업에는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으므로 휘리망 어업이 일찍부터 발달하고 있었다. 경상도에는 흥해 연일 등에서는 청어가 많이 잡혔고, 대구도 잡혔다. 강원도는 멸치가 많이 잡혔으며, 함경도에서는 명천 등지에서 명태가 제일 많이 잡혔고, 북청·길주 등에서 대구 등이 잡혔다.
남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이어서 해안선의 길이가 길고 수심이 깊지 않으면서 어족이 풍부하였다. 남해안에서는 통영이 가장 중심적인 어장이었으며, 그곳에서 청어·대구 등이 잡혔다. 웅천·거제 등에서 대구가 잡혔다. 진주와 사천에서는 문어가 많이 잡혔다. 또한 진도 등의 전라도 지역과 제주도는 미역·김 등의 채취어업이 가장 융성하였다.
이렇게 어업이 발달하자 어선과 어망을 매개로 한 대규모 어업이 발달하였고, 그에 따라 많은 자금과 인원을 동반한 어업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점차 자본을 지닌 부호들이 점차 어업에 참여하게 되었고, 나아가 자본주의적 어업의 맹아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연안어업에서 근해어업으로 확대되어가는 것을 금지하였고, 궁방과 아문 및 정부에서는 어업의 이윤을 세금으로 수취하고자 함으로써 어민들이 어업의 이윤을 확대해가기가 어려웠다. 아울러 어족적인 여건으로 어족이 매우 풍성하고 고기떼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어선과 어망을 크게 개선하면서 발달시켜 갈 필요성이 적었다. 그리하여 조선후기의 어업은 조선전기보다는 발달하고 있었지만, 근대적인 어업으로 발달하기에는 여러 가지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04.10.04
  • 저작시기2004.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935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