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국공합작의 성립 배경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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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일본의 만주․북중화 장악 기도(1931~1935)와 항일운동의 대두
1. 일본군의 중국침략과 국민당정부의 대응
2. 항일대중운동의 전개

Ⅲ. 중국공산당의 소비에트혁명론에서 항일통일전선론으로의 전환

Ⅳ. 국민당정부의 항전건국체제의 전환

Ⅴ. 서안사변과 국공합작의 성립

Ⅵ. 맺음말

본문내용

민족의 입장에서‘일치항일’을 희구하는 대다수 중국민중에게 안도감을 주었고, 장개석이 중공의 협상책임자인 주은래에게 내전의 중지를 약속한(명문화되지는 않았지만) 것을 계기로 내전의 기본적인 정지와 국공간의 지속적인 정식회담의 길을 터주었다. 국공회담에서 국공합작의 조직형식, 홍군의 개편, 변구(邊區)문제의 3항이 쟁점이었고, 남경정부는 서안사변의 마무리 직후부터 항일에 적극 나서되 어디까지나 국민당이 주도권을 잡는 ‘단결건국(團結建國)’의 방향을 추구했다.
국공간에 서로 갈등의 소지는 없지 않았지만 7월 7일 노구교사건(蘆溝橋事件)의 발생으로 전면적인 중일전쟁이 개시되었고, 8월 13일에 일본군이 상해(上海)를 침략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장개석은 국민총공원의 필요에 쫓겨 개괄적인 합의를 서둘렀다. 지휘체계는 국민정부로부터 각 사단에 연락참모가 파견되는 조건으로 홍군 독자의 총지휘 설치에 동의했고, 섬감녕변구(陝甘寧邊區)를 국민정부 행정원직속 행정구역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상황에 쫓긴 합의였으므로 나중에 대립의 불씨가 될 수 도 있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이러한 합의는 홍군을 국민혁명군 제 8로군(八路軍)으로 개편하도록 명령하고, 이어서 9월 23일 국공합작을 공식선언하는 담화문을 장개석의 명의로 발표함으로써 끝마무리를 지었다. 제 2차 국공합작의 항일통일전선은 중앙정부로서의 국민정부의 반정부세력을 관대히 용납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Ⅵ. 맺음말
중국의 항일전 수행능력은 군사적경제력정치력으로 구성된다하겠는데 그 중 정치력을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 꼽을 수 있다. 또한 활용 가능한 모든 토착자원을 동원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것이 바로 민중을 동원하는 것인데 이러한 통일전선의 중국적 형태인 국공합작으로 1937년에 일단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민중의 일상적인 이익과 항일전을 결합시켜 민중을 재조직하고 민중의 창의와 조직력에 의해 주어진 곤란을 극복하는 작업이다. 민중의 참여로 자연발생적 대중운동에서 구국회운동을 거쳐 전구련으로까지 발전했지만 이것이 곧 민중의 의사라고 할 수는 없다.
국민당은 사실상의 중앙정부를 담당했으므로 민족적 위기를 타개할 일차적인 부담을 지고 있었다. 국민당은 일본에 즉각 항전에 나서는 것은 비현실적인 대책으로 보고 지구전(持久戰을) 구상했고 그것을 위해 당장 실현 가능하다고 보는 대내적인 안정(통일)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 실리적 계산 속에 일본의 침략과 내전으로 시달리는 민족구성원의 대다수인 민중의 고통이나 연원이 헤아려지지 않았는데 문제점이 있다. 그 원인은 1928년 이래 지속되어 온 장개석 정권의 구조적 경직성에서 찾을 수 있다. 항일전을 수행해 나가면서도 장정권이 생각해낼 수 있는 민중동원이란 고작 징병의 차원이었지만 그 또한 부패의 온상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정부항전론(政府抗戰論)’인데 장정권의 안보를 축으로 한 항일론이었다. 장정권의 토벌작전에 시달리던 공산당은 통일전선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자신의 정치력을 신장시키는 동시에 민족적 요구에도 부응하여 ‘전민항전론(全民抗戰論)’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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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13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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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73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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