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처용가>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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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서론

2.본론
1)전문
2)어구풀이
3)현대역
4)구조와 내용
5)연구사
6)처용설화
7)향가<처용가>의 성격
8)고려<처용가>의 형성
9)처용무

3.결론

본문내용

49,1982), 22쪽
문맥으로 보아 세종 이전에 오방처용무가 형성되어 있었고, 세종이 그것을 계승하면서도 성리학의 입장에서 “신라성대 소성대(昭盛代) 천하태평 나후덕(羅候德)”으로 시작하여 “아으 열병대신의 발원이샷다”로 끝나는 무가 계통의 처용가 대신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에 가기(佳氣) 울총총(鬱 )하샷다”로 시작하여 “성자신손이 억만년이쇼셔”로 끝나는 송도가 계열의 봉황음으로 가사를 바꾼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조는 그 법제를 크게 늘려 “처음에 승도(僧徒)가 불공하는 것을 모방하여 기생들이 영산회상불보살을 제창하고 외정에서 돌아 들어오는”것으로 시작하여 “기생 한 사람이 나무아미타불을 창하면, 여러 사람이 따라서 화창하고, 또 관음찬을 세 번 창하면서 빙돌아 나가는”음악을 합주하게 하였다고 하니, 후도는 세조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조선 초기에 세종 때와 세조 때로 나뉘어 두 차례에 걸쳐 처용가무가 제작된 것은 처음에는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무교원리에 의한 처용가무를 유교적으로 변용시켰고, 나중에는 숭불정책에 의해 불교적으로 윤색한 처용가무를 연행한 사실을 의미한다.
이같이 조선시대에 처용가무의 연행방식이 유교를 숭상하느냐, 불교를 숭상하느냐에 따라 분화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고려시대에 처용설화가 유교세력이냐, 불교세력이냐에 따라 분화된 사실
) 『삼국유사』의 처용설화는 동해용신(해신)인 처용이 불교에 조복되어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 되고, 나아가선 헌강왕의 왕정을 보좌한 호국신이 되어 역신을 퇴치한 사실과 동해용왕을 망해사에 봉안한 사실을 같이 기록한 점에서 불교를 숭상하는 집단에 의해 전승된 설화라면, 『삼국사기』의 처용설화는 헌강왕 앞에서 산신과 해신의 가무를 연행한 사실만을 전하는 점에서 ‘기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의 유교적 역사관에 의한 기술태도를 보인다.
박진태, 앞의 책, p.121
과 맥락을 같이한다. 역사관 내지 역사의식의 차이가 문학만이 아니라 연극에서도 異本적 차이를 결정지은 것이다.
Ⅲ.결론
이상으로 다룬 내용들을 결론적으로 살펴보면
① 고려 처용가는 연행과 관련시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그 구조를 발단 전개 절정 대단원의 4 단락으로 구성된 (주술성을 바탕으로 한 무가적인 특성이 지배적인) 극적 구조로 볼 수 있다.
②《삼국유사》의 <처용가>는 호국적 차원의 교화적 의미를 담은 가요이고, <처용가>의 무속적 변질은 '고려<처용가>'에 와서 실현되었다고 하겠다.
③ 민간에서 궁중으로의 유입에 따른 변모와 정비의 과정을 생각한다면 기록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고려 <處容歌>의 발생시기는 충렬왕 이후라고 생각된다.
④ 신라의 처용가에 바탕을 둔 고려시대의 처용가무는 민간에서 이원적 전승(잡희로서의 처용가무와 무가적인 성격이 강한 의례적인 처용가)된 것이 궁중으로 유입되었다. 무가적인 형태로의 변모가 큰 흐름을 주도하고 있지만 그 일부가 단순한 잡희, 놀이로서 연행되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음을 알아야겠다. 고려처용가는 다른 속악가사가 그 명칭처럼이나 음란폐사를 다룬 것이 주인 것에 반해 무가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민간전승에 있어 단순한 유행가적 차원의 노래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처용가>는 신라<처용가>에 비해 대부분이 무가적인 형태로 변형되어 역신을 쫓는 구나의식의 행사인 처용무를 하기 위한 노래였으며, 처용무는 조선조에 대규모의 연극으로 궁정에서 상연되었다. 조선 시대에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개혁을 단행하면서 잡희적인 성격의 처용가무는 버려지고, 의례적인 처용가무가 궁중정악으로 정착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처용가>에 대한 연구는 신라 처용가와 처용설화에 대해서는 활발하게 논의된 반면, 고려 처용가는 문헌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그러하지 못했다.
따라서 앞으로 고려<처용가>에 관한 연구는 기존의 신라<처용가>에 대한 논의를 기초로 하여, 그것이 어떠한 사회적·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변모했는지, 또한 그로 인해 변모된 양상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에 대해 살펴보아야겠다.
향가<처용가 원문> <현대역>
東京明期月良 東京 밝은 달에
夜入伊遊行如可 밤들이 노니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들어 자리를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다리가 넷이러라.
二 隱吾下於叱古 둘은 내해였고
二 隱誰支下焉古 둘은 누구핸고.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디 내해다마는
奪叱良乙何如爲理古 빼앗은 것을 어찌하리오.
<양주동 해독> <김완진 해독>
싶힝 빛긔 딪래 東京 빛기 딪라라
밤드리 노니다가 밤 드리 노니다가
드러힝 자리 보곤 드러힝 자링 보곤
가링리 네히어라 가로리 네히러라.
둘흔 내해엇고 두힝른 내해엇고
둘흔 뉘해언고 두힝른 누기핸고.
본딪 내해다마링 돈딪 내해다마링다
아힝다 엇디힝릿고 아힝다 엇디힝릿고.
<배경설화>
「三國遺事」권2, <處容郞望海寺>條
第四十九,憲康大王之代,自京師至於海內.比屋連墻,無一草屋.笙歌不絶道路.風雨調於四時.於是大王遊開云浦.(在鶴城西南.今蔚州).王將還駕.畵曷穴於汀邊.忽雲霧冥日壹.迷失道路.怪問左右.日官秦云.此東海龍所變也.宜行勝事以解之.於是束力有司,爲龍 佛寺近境.施令已出.雲開霧散.因名開雲浦.東海龍喜.乃率七子現於駕前.讚德獻舞秦樂.基一子隨駕入京.輔佐王政.名曰處容.王以美女妻之.欲留其意.又賜級干職.其妻甚美.疫神欽慕之.變爲人.夜至基家.竊與之宿.處容自外至其家.見寢有二人.乃唱歌作舞而退.歌曰.東京明期月良夜入 伊游行如可入良沙寢矣見昆脚鳥伊四是良羅 二 隱吾下於叱古 二 隱誰支下焉古本矣 吾下是如馬於隱奪叱良乙何如爲理古.時神現形, 於前曰.吾羨公之妻.今犯之矣.公不見怒.感而美之.誓今已後.見畵公之形容.不入其門矣.因此,國人門巾占處容之形.以僻邪進慶.王旣還.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曰望海寺.亦名新房寺.乃爲龍而置也.又幸鮑石亭.南山神現舞於御前.左右不見.王獨見之.有人現舞於前.王自作舞.以像示之.神之名或曰祥審.故至今國人傳此舞.曰御舞祥審.或曰御舞山神.或云.旣神出舞.審象其貌.命工摹刻.以示後代.故云象審.或云霜髥舞.此乃以其形稱之.又幸於金剛嶺時.北岳神呈舞.名玉刀鈐.又同禮殿宴時,地神出舞.名地伯級干.語法集云.于時山神獻舞.唱歌云.智理多都波.都波等者,盖言以智理國者.知而多逃,都邑將破云謂也.乃地神山神知國將亡.故作舞以警之.國人不悟.謂爲現瑞.耽樂滋甚.故國終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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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22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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