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 변혁기론(唐宋變革期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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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당송 변혁기론(唐宋變革期論)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唐宋變革期의 발단과 전개
1. 당송변혁과 시대구분론
1) 내등의 당송간 사회변화 특징

Ⅱ. 안사의 난 이후의 정치. 경제적 변화
1. 당 지배구조의 동요
1) 당전반기의 지배구조
2) 도호(逃戶)의 발생과 괄호(括戶)정책
3) 부병제의 동요
4) 안사의 난
2. 번진체제(藩鎭體制)의 성립
1) 번진체제의 확립
2) 번진의 성격변화
3. 양세법(兩稅法)의 실시
1) 양세법의 실시 배경
2) 양세법의 실시
3) 문제점

Ⅲ. 당송 간 사회 변혁의 여러 측면
1.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경제 중심의 남이
1) 농업 생산력의 발전
2) 경제중심의 남이
2. 상업과 도시의 발달
1) 상업의 발달.
2) 도시의 성장

Ⅳ. 시사점
1. 당송 변혁기 중국의 정치적 동향

Ⅴ. 당송변혁기 특징
1. 번진 체제
2. 번진 세력의 몰락
3. 정치, 경제 중심지의 변경
4. 정권교체의 특성
5. 5대 시대 정권교체 과정

본문내용

왕안석을 발탁하여 전권을 일임, 개혁을 추진하게 하였다. 이러한 신종의 절대적인 신임하에 왕안석은 곧 개혁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차와 소금 등의 전매수입 일체를 재상의 관할로 하여 재정의 실권을 쥔 후, 이어 차례로 대담한 정치개혁인 「신법」을 추진하였다. 왕안석의 개혁안은 당시 송의 정치사회의 병폐를 직시하고 이를 개선하여 국민경제의 발전과 국가재정의 충실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약자의 이익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이루어진 개혁이었으므로 강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을 침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강자의 위치에 있던 구관료와 학자들은 태조 이래의 조종의 성법을 바꾸었다고 왕안석을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종래 왕안석의 신법에 대한 평가는 남송 이후 명청대에 이르기까지 부정적인 면이 강하였다. 즉, 왕안석을 전통을 파괴하고 북송을 멸망으로 가져간 장본인이라고 낙인을 찍고 있다.
Ⅴ. 당송변혁기 특징
1. 번진 체제
710년 하서(河西)번진이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안사의 난 직전까지 변경에 10개가 설치되었다. 난이 평정된 뒤에는 내부지방에도 잇따라 설치하여, 약 45개가 출현하였다. 오대와 송나라 초기에는 더욱 그 수가 늘었다. 2개 이상의 주(州)를 그 관할구역으로 하였고, 절도사의 치소(治所)가 있는 주를 회부(會府), 그 관할하의 모든 주를 지군(支郡)이라 하였다. 회부에는 절도사의 친위군격인 아군(牙軍)이 있고, 지군에는 절도사와 주종(主從)관계를 가진 진장(鎭將)이 거느린 외진군(外鎭軍)이 요충지 진(鎭)에 주둔하여, 문관인 주자사(州刺史)·현령(縣令)을 억제하면서 무인(武人) 지배체제를 취하였다.
당시 중앙재정은 상공(上供)이란 명목으로 절도사에 의하여 번진 영내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에 의지하였는데, 절도사는 병력강화를 위하여 상공을 꺼리는 경향이 점차 강하여졌다. 특히 당시의 범양(范陽)·성덕(成德)·천웅(天雄) 등 소위 허베이삼진[河北三鎭]은 항상 자립의 움직임을 보이고, 종종 반란을 일으켜 중앙정부를 위협하였다. 9세기 초에 당나라 헌종(憲宗)이 번진억압책에 성공하여, 중앙으로부터 절도사를 파견하고 외진군을 절도사 관할에서 분리시킴으로써 당은 안정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황소의 난을 계기로 번진이 일제히 자립하여, 마침내 당은 멸망하였다. 오대 때에는 번진에 의거한 무인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무인정치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송나라 태조·태종은 적극적으로 그들의 해체책을 시행하여, 마침내 번진체제는 붕괴되었다.
현종의 폭정은 현종조는 개원의 치라고 불릴 정도로 태평성대였다. 그러나 현종의 말기에는 현종이 정치를 등한시하고 양귀비와 놀아나서 백성들은 다시 도탄에 빠지고 지방의 절도사인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인 안사의 난과 농민 반란인 황소의 난에 의해 멸망한다.
2. 번진 세력의 몰락
당나라 말기의 상황부터 보겠다. 당은 안록산의 난 이후에 지방의 절도사들이 실권을 차지하면서 실질적으로 독립적인 정권을 수립하고 있었다.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후량이란 나라를 세웠을 때 어떤 지방 정권은 후량의 연호를 사용했고, 또 어떤 지방 정권은 사용하지 않았다. 즉, 당나라라는 느슨한 끈으로 묶여있던 중원지역에서 중앙정권이 교체되어 버리자 그 끈이 끊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아주 내놓고 독자적인 길을 가기 시작한다.
5대 중 첫 번째 정권인 후량 정권은 2대만에 태원에 근거지를 두었던 이존욱에게 멸망하고,
후당이라는 나라가 발생한다. 이후 수십 년 간 어지러이 정권이 교체되는 것이 잘 아시는 5대 10국 시대이다. 이러한 정권 교체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이 반독립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 지방 세력들이었다. 5대의 마지막인 후주의 세종 때에 이르러서 이러한 지방정권들의 독립성이 상당히 약화됩니다. 당연한 것이 수십 년 간 수없이 싸우다보니 국력이 쇠진 해지므로 상대적으로는 중앙 정권의 군사력이 지방을 압도하게 된다.
그 결과,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운 직후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수립하려고 했을 때 별다른 저항이 없이 지방의 독립 세력은 중앙에 흡수된다.
3. 정치, 경제 중심지의 변경
당나라의 수도는 장안이며 장안을 중심으로 한 관중지방이 정치 및 사회적 중심지였다. 관중지방 자체는 그렇게 비옥한 지역이 아니다. 장안의 번영은 강남지방의 막대한 잉여생산물에 기반한 것이었다. 강남지방은 중원의 중앙정권이 없을 때, 자신들의 생산력을 중앙에 빼앗기지 않았을 때 급속도로 발전하다가 통일이 되면 다시 침체기에 빠지는 역사를 반복한다.
당나라 말기 전란이 계속되고 특히 지방의 독립성이 강해지면서, 강남지역에서 세금을 거두어 장안까지 가져오는 일이 아주 어려워지게 된다. 전쟁 자체로 관중 지역의 인구(생산력)도 줄어든 결과 강남의 생산물을 쉽게 가져올 수 있는 지역이 중요해지고, 그곳이 바로 개봉이었다. 개봉은 양자강 이북과 이남을 연결한 대운하 등 중국 각지를 연결한 운하가 서로 만나는 수로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즉, 개봉을 점령한 자가 경제력을 바탕으로 힘을 키울 수 있기 때문에, 개봉은 새로운 정치의 중심지로 부각되었고, 5대 정권은 대부분 개봉을 수도로 삼고, 송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4. 정권교체의 특성
5대 교체기의 특징 하나는 정권이 교체될 때 대규모의 유혈사태가 별로 없었다. 거란의 침공을 받았을 때는 대규모 학살이 있었지만, 중국 사람들끼리 정권을 빼앗고 뺏기는 과정은 대부분 막후의 실력자들끼리의 교섭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것은 그만큼 황제와 신하들 사이의 유대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더라도 끝까지 황제를 위해 싸우겠다는 세력이 있다면, 정권을 뺏으려는 쪽과 지키려는 쪽이 서로 피를 보면서 싸우기 마련이다. 그런데, 5대 10국 시대에는, 황제쪽이 세력이 기울면, 황제는 말 그대로 홀홀단신이 되어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5. 5대 시대 정권교체 과정
절도사(또는 장군)이 반란
=> 주변 세력들이 호응
=>황제가 토벌군을 보낸다
=>토벌군도 반란군에 합류
=>황제가 방어를 위해 신하들과 군인들을 소집
=>아무도 안 나온다.
=>황제가 혼자 도망
=>반란군이 수도에 들어와 새 황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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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03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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