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시기 일본의 외교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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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日本近代의 獨自性과 그 背景
(1) 명치유신의 배경. 그리고 당시 일본의 상황과 논의
(2) 탈아론의 주 내용

2. 중국의 近代化(일본과 달리 중국은 왜 실패했나
(1). 근대화의 서론
(2). 근대시기의 중국을 둘러싼 국제 관계와 중국 측의 대응

3. 근대 일본의 외교와 중·일 전쟁
(1).1920년대(제 1차 세계대전 후
(2). 중일전쟁의 사상

4. 大東亞共榮圈
(1). 서론
(2). 배경

5. 독선적 대동아 구상

6. 근대 일본 외교의 평가
(1). 외교 정책을 분석하는 ‘도구’
(2). 일본 외교의 전통적 태도

<참고자료>

본문내용

일본군 병력을 채우기 위해 징병제를 실시했다. 그리고 일본군 병사를 위해 조선인 등의 여성을 종군위안부로 동원했다.
경제면에서는 국가 총동원법 등의 통제법을 적용, 군수생산을 행했으나, 현지 노동자의 임금은 일본인의 반 정도에 불과했다. 또한, 국민 징용령을 식민지에까지 적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공장이나 탄광 등에 강제적으로 연행해 일을 시켰다. 만주에서는, 「왕토낙토」의 건설을 제창, 군비 산업 우선의 공업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대소련 작전기지, 일본에의 원료자원과 식량의 공급이라는 과제를 짊어지워, 저임금노동 등으로 민중의 생활을 압박했다. 게다가 일본은 만몽개척단으로서 많은 농민을 만주 농촌으로 이주시켰으므로, 중국인 농민은 토지를 빼앗겼다.
점령하에 있던 아시아태평양의 지역에서는, 일본군이 징발기관상사 등을 통하여, 석유고무목재광석식량 등을 징발하고 그 대가로 군표 등을 남발하는 바람에 악성 인플레이션이 진행되었다. 또한, 노동자의 징발과 항일 운동 참가자로 간주된 주민의 학살도 행해졌다.
실제로 대동아공영권에서 일본이 한 일은 피점령국의 주요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하는 것이었으며, 이 목적을 위하여 식민지와 점령지의 독립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일본의 침략과 가혹한 점령정책에 따라 동남아시아의 각지에서 반일저항운동이 일어나고 이 저항을 통하여 아시아의 민족해방 운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943년 11월, 일본은 대동아 회의를 동경에서 개최, 「대동아를 영미의 질곡에서 해방」시킨다는 대동아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회의의 참가국은 타이와 인도 이외에는 일본군의 지배하에 있는 「만주국」「중화민국」「필리핀」「버마」뿐이었다. 이는 「대동아공영권」의 허구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의 구현이야말로 구미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동아시아 각 민족의 생존권과 번영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정당화하면서, 한편으로는 식민지 혹은 점령지의 민족독립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해갔던 것이다. 또한 조선, 만주, 화북(華北), 화중(華中)에서 일제에 의해 전개된 노동력의 강제징용은 남방으로까지 확대되고, 남방작전지역에 조선인, 중국인을 군부(軍夫), 군속(軍屬)으로 강제 파견했다. 그러나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은 점령지와 식민지 민중의 저항운동과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군 승전(勝戰) 당시 일본의 패전의 결정적인 원인으로는 (1)미드웨이 해전에서의 해군력의 대패배, (2)추가 자원(병력, 자원)의 공급의 문제- 특히 전투기를 만드는 철강제품의 추가공급이 없어서 베니어판으로 만들었다는 일화는 이 당시 일본의 자원부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으로써 허황된 슬로건으로 끝났다.
5. 독선적 대동아 구상
- 일본인이 세계를 4대권으로 나누고 아시아인의 아시아를 제창한 것은 실제 세계와 아시아의 현실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아시아는 일본의 이러한 세계 분할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독일도 소련을 공략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4대권간이 조화라는 관념은 일본의 독선적이고 몽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 대동아에서의 일본의 우위 혹은 아시아인의 아시아라는 관념도 독선적이다. 중국인은 일찍부터 일본인의 아시아주의를 공격하고 있었다. 중국은 아시아를 서양의 제국주의적 지배에서 해방시키는 것에는 찬성이지만, 군국주의적인 일본이 그 책임을 떠맡는 것 또한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 명치(明治) 이래 군사, 경제면에서의 구체적인 정책만을 축으로 하고 있었던 일본의 대외관계가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게 되며, 이 이데올로기가 외교사상으로 대두되어 온 사실 그 자체가 국제관계의 변동에 기인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세 변화에 따라서는 완전히 현실성을 상실해 버릴 가능성도 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동아권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집요하게 일본 외교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현실과 이론차이야말로 1941년 일본 외교의 최대 문제였다.
6. 근대 일본 외교의 평가
(1). 외교 정책을 분석하는 ‘도구’
- 외교정책이나 외교 논의 모두 일본에 대한 외국의 태도의 동향과 국제정치에 관한 사고방식의 변천에 크게 좌우되고 있다.
- 일본의 외교정책을 형성하는 요인과 그 특징을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외교정책의 분석 ‘도구’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 외교의 사상적 배경을 알아봄으로써 일본이 놓여진 국제적 지위를 이해해야 한다.
(2). 일본 외교의 전통적 태도
- 일본의 외교는 항상 현실적이고 실제적이었으며,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때마다 대응해 갔으며, 군사와 경제적인 면에서의 국익이 일본의 외교사상의 틀을 만들어 갔다.
- 때로는 국가의 안전, 무역이라는 실리적인 관념 외에 일본의 외교를 지탱한 사상으로서 동과 서 사이의 일본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명치 중엽 이래 민간의 아시아주의자들은 아시아의 일본, 서력 동점에 대항하는 아시아의 지도자로서의 일본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동과 서라는 이원론은 일본 외교가 낳은 유일한 중요한 사상이다.
- 명치(明治) 이래 일본인이 의식적으로 서양화했다는 사실, 아시아에서 최초의 강국,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는 의식, 그것이 서양의 의구심과 공포감을 조장하고 서양으로부터 완전히 평등시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 이러한 것들이 소위 명치 외교의 심리적 축적이 되었으며, 또한 사상적 유산이 되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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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熙在,「光緖初 權力關係의 변화에 대하여」,『東洋史學硏究』55, 1996
車瓊愛,「1900년 前後 列强의 對中國政策」,『東洋史學硏究』62, 1998
崔碩莞,「日本政府의 동아시아질서 재편정책과 淸日戰爭」,『東洋史學硏究』65, 1999
히가 토우루,『명치유신과 일본인』, 예하, 1989
金容德,『日本近代史를 보는 눈』, 지식산업사, 1991
나가이 미치오/ M.우르타이, 『세계사의 흐름으로 본 명치유신』, 교문사, 1994
王曉秋, 『근대 중국과 일본: 타산지석의 역사』,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2
趙明哲, 『日本人의 선택; 일본인,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어떤 선택을 하였는가』,다른세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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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17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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