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해방운동의 활성화와 신간회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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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민족해방운동의 활성화와 신간회 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식민지배정책과 자치운동

2. 대중운동의 성장

3. 조선공산당의 활동과 노선

4. 신간회 운동

5. 민족해방운동의 성격과 의의

읽으면서 느낀 점.

본문내용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신간회는 조선인에 대한 착취기관 철폐, 일본인의 조선이민 반대, 타협적 정치운동 배격,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실시, 사회과학과 사상연구의 자유 보장, 식민지 교육정책 반대 등을 주장하면서 파업, 소작쟁의, 동맹휴교 등을 지원했다. 상당수의 당원과 공청원이 참가하여 활동을 주도했던 신간회 지회는 대체로 각 지역의 사회적, 계급적 특성을 반영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신간회의 중앙조직은 비타협 민족주의 세력이 우세했고, 지회에서는 사회주의 세력이 우세했다. 신간회 본부는 정치경제, 노동 농민, 청년, 여성, 형평 등의 각 과를 두었으나, 활동수준은 부문운동의 형편을 조사하는 정도였다. 각지의 노동운동가, 농민운동가, 청년운동가 들이 신간회에 참여했지만 조직적 차원에서 부문운동을 적극 지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회들은 조직형태가 중앙집중적이며 노동자와 농민이 조직의 주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강령에 따른 구체적 활동을 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지회들은 집행위원장제를 도입하고, 지회연합기관을 조직하며, 구체적 행동강령을 조직하여 투쟁할 것 등을 요구했다.
신간회는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기대회를 준비했으나, 총독부의 탄압으로 실시되지 못했다. 신간회가 애초에 내세웠던 정치투쟁은 신간회 내부의 조직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실행되기 어려웠다. 결국 신간회는 복대표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929년에 열린 복대표회의에서는 신간회의 강령과 규약이 제정되었고, 중앙간부의 절반이상이 사회주의자였다. 그 해 7월 ‘갑산화전민사건’ 진상 보고회를 열려고 했으나 일제에 의해 금지 당하자 결의문을 발표하는 등 즉각적으로 맞섰다. 또 실제투쟁방침에 대한 결의를 확정하는 한편 회보 발행, 지회활동의 활성화, 재정확립, 지방순회 등의 계획도 세웠다.
신간회의 활동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광주학생운동을 대중운동으로 확대하려 했던 점이다.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광주학생사건보고 대연설회’ 를 개최하려 했으나 역시 일제 경찰에 금지 당했다. 그러자 운동을 전국적인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여러 세력과 제휴하여 12월에 민중대회를 개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 역시도 허헌을 비롯한 90여명이 검거됨으로써 결국 중단되었다.
‘민중대회사건’ 으로 타격을 받은 신간회는 김병로를 집행위원장으로 선출하여 본부를 이끌어 나가고자 했으나, 이후 점차 개량화 되어갔다. 자치론자들과 협력하여 합법운동을 주장하거나, 합법노선을 적극 옹호하는 사람들이 각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같이 신간회가 온건적이고 합법적인 노선으로 전환하자 사회주의자는 조선의 해방운동에서 부르주아민족주의가의 혁명성을 부인하기 시작했고, 대체로 사회주의세력이 우세했던 각 지회에서는 해소론이 제기되었다.
5. 민족해방운동의 성격과 의의
1920년대 중반 일제의 지배정책은 민족해방운동세력의 분열과 제 2차 산미증식계획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약탈의 강화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 결과 식민지 조선의 부르주아세력은 일제에 더욱 예속되어갔으며, 민족해방운동세력과 민중의 저항에 대한 탄압은 끊임없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속에서도 일반 대중운동은 끊임없이 전개, 확산되었다. 민족해방운동세력은 대중운동의 확산은 물론 정치의식의 확대를 위해 노력하면서 민족국가 수립방안과 내용을 구체화 시켰다.
1920년대 중 후반 부르주아 민족주의세력은 개량주의 세력과 비타협 세력으로 나뉘어 독자적인 세력화를 추구하였고, 비타협 세력은 민흥회, 신간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반일 혁명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그들은 일제를 몰아내고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라면 사회주의 세력과도 기꺼이 연대하였다.
사회주의 세력은 조선혁명의 성격을 노동자와 농민이 주도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혹심한 탄압 아래서도 대중운동단체의 활동을 지도하면서 대중운동의 정치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비타협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하는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통해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해방이후의 국가권력 형태는 혁명적 인민공화국 건설방안을 정립시켰다.
이 시기의 민족해방운동에서 보이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해방운동전선을 재정비하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 서로 협력하며 새로운 운동방향을 수립했다는 데 있다. 특히 신간회 운동은 민족유일당운동과 함께 1920년대 전반기 민족통일전선운동이라 할 초기 임시정부운동 및 국민대표회와 1930년대 이후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을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했다.
하지만 1920년대 중 후반 민족해방운동세력은 반일혁명운동에서 많은 약점을 노출했다고 하겠다. 부르주아민족주의세력은 일제의 조선 식민지 정책에 흡수되어 점차 개량화의 길을 걸었고, 사회주의 세력은 끝내 ‘파벌주의’ 를 극복하지도, 단일한 혁명전선을 만들어내지도 못한 채 ‘조선공산당의 재건’ 이라는 숙제를 안고 새로운 정세를 맞게 되었다.
읽으면서 느낀 점.
이 글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용어를 많이 사용하여 적응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것은 아마도 강만길 선생을 주축으로 하는 고려대학파의 고유 용어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민족해방운동사에서 ‘통일전선체의 확립’ 이라는 것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실질적으로 ‘신간회’ 가 좌우익 합작단체로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의 독립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 것이 아닌가 싶다. 신민회의 활동이 주로 소작쟁의나, 조선인의 권익보호 등에 머물러 있는 것은 그러한 것의 반증이다. 또한 통합의 노력이라는 것도 실질적으로 조직이 합쳐진 것이지, 단일한 운동방향이 정해진 것도 아니며,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한계를 가지고 있는 운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바, 민족해방통일전선의 노력은 분명히 필요하고, 긍정적으로 평가될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균형 잡힌 역사 관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족 유일당 운동, 민족해방통일전선에 관해서 좀 더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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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22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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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79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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