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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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당초 중국 북부의 비옥한 전답들을 말의 목초지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시킬 위대한 정복은 아직 수행되지 않은 단계였고 그 주목표로 중국이 떠올랐다. 칭기즈 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西夏)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다. 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베이징[北京]을 함락시켰다. 그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칭기즈 칸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화레즘 샤의 정벌에 나섰다. 그 전쟁은 칭기즈 칸의 보호를 받고 있던 한 이슬람 대상을 몰살시킨 오트라르 시(市)의 지사(知事) 때문에 촉발되었는데, 화레즘의 왕은 이에 대한 보상을 거부했다. 화레즘 샤와의 전쟁은 조만간 벌어지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 전쟁을 연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이그만족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몽골족은 모든 도시를 휩쓸었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들을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 칸이 화레즘 샤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1223년 마침내 그는 철수했고 1226~27년 서하를 상대로 마지막 전역(戰役)에 나설 때까지 더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1227년 8월 18일에 죽었다.
여러 가지 다른 근거들을 종합하여 판단해볼 때, 칭기즈 칸은 다면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뛰어난 체력, 강한 목표의식,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고집이 센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내들이나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조언을 즐겨 들었다. 남을 속이기도 했지만 사소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토그릴이나 자무카와는 달리 충성심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상관을 배신하는 적수들은 칭기즈 칸으로부터 차가운 대접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는 그들의 배신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그는 종교적 신앙이 강하여 신이 자신에게 내려준 신성한 사명을 늘 의식했고, 위기의 순간마다 몽골족의 최고신에게 깊은 경배를 올렸다. 이같은 경향은 그의 유년시절에 특히 강했다. 그러나 스텝 지역을 벗어나 외부의 낯선 정착문화와 접촉하게 되면서 그의 성품 가운데 다른 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학살과 약탈에 의해 얻어지는 직접적인 이득 외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때로는 복수의 일념으로 불타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평생 자신에게 충성할 사람들을 주위에 끌어모았다. 그리하여 그의 추종자들 중에는 동료 유목민뿐만 아니라 정착문화 세계에 사는 문화인들도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적응력이 뛰어나고 배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군사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조직, 기강, 기동성, 무자비한 목적의식 등이 근본적인 바탕이 되었다. 특히 피정복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약탈을 자행하는 것이 그가 정기적으로 사용해온 무기였다. 성읍들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응하지 않는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 일종의 심리전이었다고 이야기되어 왔지만, 그가 사용한 방법은 20세기에 저질러진 학살에 비교될 만큼 잔인했다. 학살정책은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저항의식을 꺾고자 한 것이었지만 학살을 위한 학살도 많이 자행되었다.
칭기즈 칸의 업적은 위대했다. 그는 유목민 부족을 모두 통일했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화레즘 샤나 금 같은 대제국을 정복했다. 또한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의 부족들을 피폐시키지 않았다. 그는 아들인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선임하고, 다른 아들들이 오고타이의 말에 따르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으며, 오고타이에게 강성한 군대와 국가를 물려주었다. 칭기즈 칸이 죽었을 때, 베이징에서부터 카스피 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몽골 제국의 영토로 복속되었고, 그의 부장들은 페르시아와 러시아를 침공했다. 또한 그의 후계자들은 중국, 페르시아, 러시아의 대부분 지역에까지 세력의 판도를 넓혔다. 그들은 칭기즈 칸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그들의 정복지역을 잘 조직된 제국으로 개편하는 일을 실행했다. 칭기즈 칸은 파괴와 약탈을 자행했으나 그가 벌인 정복전은 몽골 제국의 출현을 처음으로 알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몽골 제국은 중세와 현대를 통틀어 가장 영토가 큰 제국이었다.
한편, 세계적인 시사주간 「타임」지는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했다.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예수나 석가모니도 칭기즈칸에게는 밀렸다. 칭기즈칸 이후 몽골은 그때까지 초원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조그만 부족의 이름에서 대제국의 건설자로 인류사에 굵은 획을 긋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 변화된 것은 몽골 자신만이 아니었다. 인류역사도 더이상 과거와 같은 것일 수 없었다. 유럽은 유럽대로, 중동은 중동대로, 동아시아는 동아시아대로 새로운 시대 즉 하나의 정치경제적 헤게모니 아래에 통합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의 시대를 맞이했다. 칭기즈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많은 도시와 문명을 파괴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좁은 지역세계의 울타리를 허물었고 다른 세계에 대한 무지와 미망도 날려버렸다. 이 시대에 중국을 다녀간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유럽에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킨 사실은 유럽이 그동안 외부세계로부터 얼마나 차단돼 있었으며 그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목말라했는지를 입증한다. 또한 이란의 몽골궁정에서 재상을 지낸 라시드 웃 딘이 저술한 「집사」(集史)라는 책은 유라시아의 거의 모든 민족들의 역사를 망라한,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최초의 세계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몽골제국의 탄생은 세계사의 새로운 탄생이었고 출발이었다. 몽골인은 자기들이 「탱그리(하늘)의 명령을 받고 태어난」푸른 늑대와 흰 사슴의 후예라고 생각했고 칭기즈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이 탱그리의 축복을 받아 세계를 지배하는 군주가 되리라고 믿었다. 그들이 외국의 군주에게 투항할 것을 요구하며 편지를 보낼 때도 항상 탱그리의 명령을 근거로 삼았다. 그 좋은 예가 고려에 보낸 서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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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05.03.24
  • 저작시기2005.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89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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