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통일전선운동에 관한 고찰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민족통일전선운동에 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통일전선운동의 배경
2. 1920년대: 유일당운동과 신간회
1) 중국 관내지역의 유일당 운동
2) 만주지역의 유일당운동과 3부통합운동
3) 국내에서의 신간회운동
3. 1930년대: 독립운동정당의 통일운동
1)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활동과 민족혁명당의 성립
2) 7당통일회의
4. 1940년대: 임시정부로의 통일전선 형성
1) 좌우 독립운동진영의 변화
2) 좌익진영의 임시정부 참여와 통일전선정부의 형성
3)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전선운동
5. 해방이후
1) 조선건국준비위원회
2) 좌우합작운동
3) 남북협상운동

Ⅲ. 결론

본문내용

가운데 평양에서 열린 일련의 정치회담. 47년 5월 한국문제 해결을 위하여 제 2 차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는데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미국은 한국문제를 국제연합으로 이관하였다. 48년 1월에 국제연합은 국제연합임시한국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했으나 이들의 북한방문 요청이 소련과 북한에 의해 거부되어 남북을 통한 통일선거실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남한에서는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하는 이승만(李承晩) 계열과, 남한단독정부의 수립은 국토의 영구분단과 민족분열을 초래한다는 주장을 펴는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계열로 국론이 양분되었다. 같은 해 2월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김일성(金日成)과 김두봉(金枓奉)에게 남북요인회담의 개최를 요망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회답을 받지 못했다. 2월 26일 국제연합소총회는 <총선거는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만 추진한다>는 방안을 표결에 붙였으며, 31:2로 가결되어 한국의 분단은 고정되었다. 그 뒤 북한은 3월 25일 평양방송과 서신을 통해 북한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 제26차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알려 왔다. 즉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남한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사회단체와의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조선의 민주주의독립국가 건설을 추진하는 것을 공동목적으로 하자는 내용을 결의한 것이다. 북한은 이 서한을 민족자주연맹·한국독립당·남조선노동당 등 17개 단체와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단체 및 김구·김규식 등의 15명에게 전달했다. 국내의 여론이 단독정부수립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갈라져 들끓는 가운데 남한에서는 김구·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 이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대표들과 원세훈(元世勳) 이하 민족자주연맹대표단, 민주독립당의 홍명희(洪命熹) 등이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제정당 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에 참가했다. 이 회의에서는 <삼천만 동포에게 호소하는 격문>을 채택, 16개 정당대표와 40개 단체대표가 서명하였고, 미·소 양군의 즉각 철군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양국에 전달할 것을 결의하였다. 4월 27일에는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金朋濬)·이극로(李克魯)·엄항섭(嚴恒燮)·김일성·김두봉·허헌(許憲)·박헌영(朴憲永)·최용건(崔鏞健)·주영하(朱寧河)·백남운(白南雲) 등 15명으로 구성된 남북요인 회담을 개최하고 남북통일정부수립방안에 관한 성명을 채택했다. 이어서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명의 <4김회담>이 이루어졌는데, 여기에서 남한측은 ① 연백평야(延白平野)에 공급하다 중단된 수리조합 개방문제 ② 남한으로 공급하다 중단한 전력의 지속적인 송전문제 ③ 조만식(曺晩植)의 월남허용문제 ④ 만주 뤼순[旅順]에 있는 안중근(安重根)의 유골을 국내이장하는 문제 등을 제의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①·②항은 수락하고 ③·④항은 뒤로 미루었는데, 김구와 김규식이 서울로 돌아와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발표한 며칠 뒤, 다시 수리조합의 개방과 전력송전은 중단되었다. 결국 남북협상은 성과없이 막을 내렸고, 이 후 대한민국정부수립과정에서 이들 통일정부수립노선을 택하였던 인사들이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해방 후의 상황 또한 해방 전과 마찬가지로 민족통합운동의 전개를 어렵게 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한국을 38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하였던 바, 그것은 두 나라가 이 지역에서 경쟁할 것이고, 그것은 한국인에 게 영향을 미쳐, 한국은 구심력보다 원심력에 이끌릴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미소의 분할 점령은 두 나라의 영향 하에 있는 세력간의 대립과 결부되어 민족통합운동에 기본적인 저해용인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었다. 두 나라의 분할점령과 밀접한 상호관계를 갖는 것이지만, 보수세력의 북에서의 남으로의 이동과, 변혁세력의 남에서의 북으로의 이동도 상호 대립을 부추기어 민족통합운동을 어렵게 하였다. 친일파는 분단에 안주하려는 경향성을 지녔는데, 일제강점기의 지주 부르주아층은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취약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일제와 유착관계에 있었는데, 해방 후의 혁명적 상황은 이들의 취약성을 더 강화하였다. 친일파와 지주·부르주아층의 이러한 성격 또한 민족통합운동에 기본적 제약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민족적 위기감 때문에도, 해방 3년간 민족통합운동은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남과 북에 체제를 달리하는 두 나라의 군대가 와 있고, 좌익과 우익이 각각 엄연히 현실세력으로 존재하고, 그것이 두 나라와 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민족통합운동만이 민족국가의 건설을 가능하게 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좌와 우, 남과 북과의 갈등 완화, 동족상잔의 방지에도 목표가 두어져 있었다. 민족통합운동은 민주주의와 개혁의 방향으로 한국 사회를 통합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결론
지금까지 1920년대 이래 민족독립운동 과정에서, 그리고 해방 후 분단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전개되었던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상과 같은 좌우합작운동에서 나타나는 특성 및 역사적 의의를 몇 가지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민족독립운동 과정에서나 분단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좌우세력들은 끊임없이 합작을 위한 시도와 노력을 전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완전한 합작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1935년 5개 정당, 단체가 통일을 이루어 민족혁명당을 성립한 것과 1940년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좌우익이 통일전선을 형성하였다는 것은 1927년 결성된 신간회와 더불어 좌우합작운동의 산물이었다.
둘째는 좌우합작운동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점차 정치적 이념이나 목표가 접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좌우 양 진영의 정치적 이념은 상호 근접해 갔고, 이를 바탕으로 1939년 김구와 김원봉이 공동강령 10개조에 합의할 수 있었던 것이고, 1942년 이후 좌익진영이 임정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좌우합작운동의 경험은 향후 남북통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 주요한 역사적 자산이 된다는 점이다. 남북분단 이후에 주입된 정치적 이념의 잣대나 상호 주관적 편향에 따라 각기 상대방의 노력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고, 이를 통해 얻어진 역사적 경험을 소중한 자산으로 활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가격2,5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5.03.29
  • 저작시기2005.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057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