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론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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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벌론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언

2. 효종조의 북벌론
1) 북벌론의 시대적 배경
2) 북벌론의 전개 과정

3. 북벌론의 허구성
1) 『계서야담』 중심의 고찰
(1) 『계서야담』 속에 나타난 효종
(2) 『계서야담』 속에 나타난 송시열
(3) 『계서야담』 속에 나타난 이완
2) 「허생전」 중심의 고찰

4. 북벌론의 역사적 성격 및 의의

5. 결언

- 참고문헌

본문내용

스승이 될 것이고, 못 되어도 백구지국(伯舅之國)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다."
이 대장은 힘없이 말했다.
"사대부들이 모두 조심스럽게 예법(禮法)을 지키는데, 누가 변발( 髮)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으려 하겠습니까?"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소위 사대부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오랑캐 땅에서 태어나 자칭 사대부라 뽐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의복은 흰옷을 입으니 그것이야말로 상인(喪人)이나 입는 것이고, 머리털을 한 데 묶어 송곳같이 만드는 것은 남쪽 오랑캐의 습속에 지나지 못한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예법이라 한단 말인가? 번오기(樊於期)는 원수를 갚기 위해서 자신의 머리를 아기지 않았고, 무령왕(武靈王)은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되놈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제 대명(大明)을 위해 원수를 갚겠다 하면서, 그까짓 머리털 하나를 아끼고, 또 장차 말을 달리고 칼을 쓰고 창을 던지며 활을 당기고 돌을 던져야 할 판국에 넓은 소매의 옷을 고쳐 입지 않고 딴에 예법이라고 한단 말이냐?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신임받는 신하라 하겠는가? 신임받는 신하라는 게 참으로 이렇단 말이냐? 너 같은 자는 칼로 목을 잘라야 할 것이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칼을 찾아서 찌르려 했다. 이 대장은 놀라서 일어나 급히 뒷문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돌아갔다.
이튼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집이 텅 비어 있고, 허생은 간 곳이 없었다. 「허생전」, 이우성(李佑成) 옮김
인용글이 다소 긴 느낌을 줄 수도 있으나, 「허생전」의 마지막 부분인 위의 글 모두가 북벌론의 허구성을 나타내는 곳이기에 전부 수록하였음을 밝힌다.
위의 글은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이다. 「허생전」에서는 효종이 북벌 추진 사업을 추진할 당시 군비 책임자였던 이완(李浣)이 등장한다. 이완이 북벌을 계획하기 위하여 인재를 구하러 다닐 때에 허생을 소개받는 것이다. 허생은 이완에게 북벌을 단행하기 위해서 꼭 해야되는 몇 가지의 일을 이야기하나 이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이 내용은 북벌을 정말로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라면 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북벌은 이루어 질 수 없음을 뜻한다. 효종을 비롯하여 북벌을 주장하고 있는 사대부들은 북벌을 대의를 위한 사업으로 탁상공론(卓上空論)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허생의 말속에 북벌론의 비현실적 성격에 대한 사실들이 나와 있다.
4. 북벌론의 역사적 성격 및 의의
북벌론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마지막으로 북벌론의 역사적 성격 및 의의를 고찰함에 있어 조금 다른 비판적인 시각을 소개하고 싶다. 왜란과 두 번의 호란 후에 백성들의 삶은 굉장히 궁핍해져 있었다. 전후(戰後)의 사회상이 늘 그렇듯이 당시의 조선 사회는 혼란만 존재하였다. 지배층이 주자학을 바탕으로 화이관을 가지고 청(淸)을 오랑캐의 나라라 하여 사대를 거부하고 반(反)청 사상이 일어났을 때, 백성들이 청을 배척한 것은 다른 이유이다. 백성들에게 청이 황제의 나라이든, 오랑캐의 나라이든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들이 반청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은 창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황폐화되고, 생(生)을 유지시켜나갈 수 있는 모든 기반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반청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당시의 지배층에서는 집권자가 효종이었기는 하지만, 인조반정(仁祖反正)이후 붕당정치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에 집권층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가장 많은 관심이 있었다. 붕당정치로 인하여 권력을 잡은 세력은 그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권력에서 배제된 세력은 다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 것이 중요하였다. 계속되었던 전쟁으로 인하여 백성들은 기본 생활 터전 마저 잃어버렸다. 갈수록 백성들 사이의 민심은 흉흉해졌고,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지배층들은 백성들의 민란을 잠재우고, 그들의 관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국가적 안보가 필요했다. 지배층에서는 백성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반청 의식을 이용하였다. 더불어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백성들 스스로도 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입은 피해가 너무나 컸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집권층에서 북벌 준비 사업을 추진해 나갈 때 적극적이었다. 즉,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민심 수습을 위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정책을 대내적으로 추진하는 듯 꾸민 것이다. 이는 백성들을 안보 문제를 가지고 우롱한 첫 번째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5. 결언
병자호란 이후에 효종이 즉위하면서 추진한 북벌론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중국 땅에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세력을 장악하면서, 조선 사회에서는 청에 대한 사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 때 8년 여간 청에 볼모로 가 있던 효종이 즉위하면서, 왕 스스로 먼저 반청의식을 발휘한다. 그에 대한 사업으로 북벌론을 주장한다. 북벌론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권력층의 이해 관계와 부합되어 그 전개를 활발히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북벌론은 민심을 모아 권력을 유지하려는 일종의 허위극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북벌론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많은 모순점들에 비추어 볼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본고에서 북벌론에 허구성에 대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보려 하였으며, 그 성격 및 의의 또한 다른 의견을 제시해 보았다. 결론을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다소 무리가 없지는 않았나 염려된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북벌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글을 써보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며 이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자료
이범직·김종연 편, 『한국인의 역사 의식』, 청년사, 1999
이경찬, 「조선 효종조의 북벌 운동」, 『청계사학』5, 1988
심민식, 『효종조 북벌론의 성립과정에 대한 연구』, 고려대 석사학위 논문, 1987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권 32, 1997
역사신문편찬위원회 편, 『역사신문』 권 4, 사계절, 1998
이명학, 「북벌론과 비판 의식」, ????, 19??
단행본
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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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5.04.05
  • 저작시기2005.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1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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