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의 해상교역-장보고와 청해진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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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인의 해상교역-장보고와 청해진을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8~9세기 동아시아 세계
1. 8~9세기 동아시아 삼국의 정세
2. 당나라의 경제체제와 朝貢貿易
3. 8세기 공무역 체제의 성립과 운영
4. 9세기 공무역의 쇠퇴와 사무역의 발달
Ⅲ. 장보고의 생애
Ⅳ. 海上王國 淸海鎭
1. 海上王國의 建設
2. 海上王國의 繁榮
3. 海上王國의 沒落
Ⅴ. 맺음말

본문내용

진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장보고가 일본에 파견한 무역 사절단을 廻易使라고 한다. 당시 일본은 북큐슈의 하카다에 설치되어 있었던 다자이후(大宰府)를 중심으로 대외 교역을 수행하고 있었다. 장보고는 하카다에 무역 근거지를 마련하고 일본 관원들과 직접 교역을 하기도 했다. 이 때 청해진의 회역사가 갖고 온 물건을 일본에서는 ‘唐國貨物’이라 했다. 이 물건들은 일본인들에게 매우 비싼 가격의 물건들로 상당히 있었다.
840년에는 장보고의 회역사가 다자이후와 직접적인 교역 관계를 맺으려 했다. 당시 청해진은 다자이후와 공식적인 교역 관계를 맺지는 못했으나, 상품의 자유로운 교역은 허락을 받았다. 이는 일찍부터 일본에 진출한 장보고가 교역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반이나 교류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장보고가 일본과 교역했던 물건의 종류나 가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시 상황을 전하는 여러 기록을 통해 볼 때 상당히 귀한 물건들을 대량으로 교역했을 것이다.
3. 海上王國의 沒落
장보고의 해상왕국이 몰락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신무왕의 즉위에 무력을 동원하여 개입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결정적 사건은 역시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두 번째 왕비로 들여보내려다가 성사되지 못한 것에 원망을 푹고 있다가 염장에게 살해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신무왕의 즉위에 공을 세우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장보고에 대해, 일부 고위직에 있는 인물들이 중앙 정치 무대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장보고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하는 음모 또한 개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三國史記』에는 장보고가 846년(문성왕 8)에 살해당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新唐書』신라전에 당나라와 장보고의 왕래가 841년 이후에 단절되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나, 『속일본후기』의 장보고 사망 연대 및 『入唐求法巡禮行記』등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장보고는 841년에 염장에게 살해당한 것이 확실하다.
장보고의 사망 후 청해진 해상왕국은 일시 염장에 의해 관리되었지만, 장보고가 이루어 놓았던 군사적 기반이나 해상 교역망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신라 중앙 정부는 851년(문성왕 13)2월에 청해진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는 장보고가 염장에게 살해된 지 9년 남짓만의 일이었다. 중앙 정부는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의 주민 집단을 단체로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
이로써 828년(흥덕왕 3)3월 장보고의 건의에 의해 설치되었던 청해진은 851년 2월에 23년의 역사에 종말을 고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838년(민애왕 원년)12월에 장보고가 김우징을 도와 민애왕에 대한 반기를 들기까지, 거의 11년 동안 장보고는 청해진을 근거로 하여 동북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하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를 잇는 삼각 중개 무역의 중추를 감당했다. 이 시기가 실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해상 무역을 석권했던 장보고 해상왕국의 전성시기였다. 839년 신무왕의 즉위와 계속되는 문성왕의 즉위로 장보고는 명예와 정치적 입장에서 생애 절정기를 맞았다. 그러나 반대로 이 시기가 바로 청해진 해상왕국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단서가 열린 때였다.
장보고는 841년 11월에 염장에게 피살되었으니 해상왕국을 이룬지 거의 14년만의 일이었다. 이후 염장에 의해 9년 남짓의 기간 동안 청해진은 존속되었으나, 더 이상 해상왕국의 명성을 유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동북아시아 바다를 석권했던 장보고 해상왕국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기간은 한 때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해상왕국을 건설했으나, 결국은 지나치게 정치 현실에 깊숙이 개입한 대가로 치러야 했던 청해진 해상왕국의 쓸쓸한 마지막 모습이었다. 정치 논리와 권모술수에 익숙하지 못한 거대 해상왕국이 혼란한 정치 상황의 와중에 휩쓸려 힘찬 파도의 마지막 물거품처럼 사라져 간 것이다.
Ⅴ. 맺음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바다길이 막히고 해양진출이 부진할 때 國運은 쇠퇴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역사 4천여년 동안 적극적인 의미의 바다를 경략하고 대외진출을 도모한 것은 백제의 요서 및 양자강 경략 그리고 그 후 3백년이 지난 다음 장보고의 죽음과 동시 청해진이 쑥대밭이 되고 唐· 宋·日本 등에 의존하는 바다경영체제로 바꿔짐에 따라 통일 신라는 몰락의 길을 재촉하였을 뿐이다. 되풀이 하거니와 동서고금의 역사는 바다를 장악하는 자가 세계사를 제패함을 보여준다. 장보고와 같은 不世出의 영웅, 바다의 사나이들이 나라 안에서 들끓는 갈등과 저항적 에너지를 신천지 개척을 위한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킴으로써 개인 발전과 국운의 진작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었다.
이제 다시 세계 유수의 해운국으로 뻗어 가는 우리나라는 바야흐로 5대양 6대주를 누비는 국제 무역의 확장기를 맞이하고 있다. 바다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 너머 새로운 '업'의 세계가 우리를 손짓하고 있다. 황해와 중국해 동해 바다를 국적 없이 떠돌지 모를 장보고와 당시 신라인들의 영혼을 달랠 새 轉機를 모색할 때다. '百家濟海'의 혼을 이어 받은 바다의 후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의 험한 파도 거친 바다를 거뜬히 경영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본능'이라고 말하여 별로 틀림이 없다.
1천여 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에도 중국 대륙 곳곳에는 이렇듯 신라인들의 숨결과 장보고의 발자취가 역력히 남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장보고는 고대 해상 민족이었던 위대한 한국인의 원형이라 말할 수 있다. 현재와 장래에 있어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는 우리나라 船團들과 국제 상사들의 嚆矢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저항적 에너르기를 한 차원 높여 大陸경영과 세계사의 開拓이라는 창조적인 이상으로 內燃시키다가 비록 비명에 갔을망정 장보고는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끊임없이 쫓아가야 할 소중한 역사적 표상이다.
<참고문헌>
◎최광식 외, 『천년을 여는 미래인 해상왕 장보고』, 청아출판사, 2003
◎허일 외, 『장보고와 황해 해상무역』, 국학자료원, 2001
◎최민자, 『세계인 장보고와 지구촌 경영』, 범한, 2003
◎윤명철, 『장보고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 학연문화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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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6.13
  • 저작시기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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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02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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