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미얀마의 문화와 역사
1. 지리와 민족 구성
2. 불교
3. 미얀마의 역사
Ⅲ. 미완의 민주화와 경제정책
1. 네 윈의 "버마식 사회주의"
3. 미얀마의 민주화운동
4. 제도로서의 군부, SLORC
5.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성격과 한계성, 그리고 성과
6. 1990년 5월 총선, 그 결과
7. 신군부의 정책
8. 시간이 멈춘 땅, 미얀마
Ⅳ. 아웅산 수지와 미얀마의 오늘
1. 아웅산(Aung San)
2.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
3. 랑군의 봄과 아웅산 수지
Ⅴ. 마치는 말
Ⅱ. 미얀마의 문화와 역사
1. 지리와 민족 구성
2. 불교
3. 미얀마의 역사
Ⅲ. 미완의 민주화와 경제정책
1. 네 윈의 "버마식 사회주의"
3. 미얀마의 민주화운동
4. 제도로서의 군부, SLORC
5.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성격과 한계성, 그리고 성과
6. 1990년 5월 총선, 그 결과
7. 신군부의 정책
8. 시간이 멈춘 땅, 미얀마
Ⅳ. 아웅산 수지와 미얀마의 오늘
1. 아웅산(Aung San)
2.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
3. 랑군의 봄과 아웅산 수지
Ⅴ. 마치는 말
본문내용
\"나는 나의 아버지 아웅산의 딸로써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사태에 무관심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제2의 독립 투쟁의 앞장을 서게 되었다.
이후 1988년 9월 18일 친위 쿠데타로 다시 권력을 확보한 군부는 국가법질서 회복위원회(The State Law and Order Restoration Council: SLORC)라는 군사정권을 만들고 정권 수호를 전면에 내걸었다. 이에 아웅산 수지는 9월 24일 전국민주연맹(The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을 창설하고 사무총장에 취임하였다. 아웅산 수지는 독재자 네 윈에 대항하면서 비폭력 운동을 전개하고 전국을 돌며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평화적인 민주 개혁과 자유 총선 실시를 요구하였다.
4. 아웅산 수지 지지의 연유
신화적인 아웅산 장군의 딸이란 점에서 젊은이들의 주목을 끌 만했다. 또 하나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지적 엘리트라는 점도 어필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성이라는 점고, 어쨌든 가냘픈 몸매의 한 여성이 남성들도 감히 함부로 말하지 못하던 내용을 거침없이 내뱉는가 하면, 네 윈 정권에 강력한 비판을 해대자 그녀는 순식간에 반정부 그룹의 지도자로 부상하괴 된다. 여기에는 특히 기존의 정치인에 식상한 채 참신한 지도자들을 갈망하고 있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젊은층의 기호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5. 가택연금 후의 아웅산 수지
1989년 7월 20일 군부정권은 영장 없이 체포하고 3년간 재판 없이 구금할 수 있도록 하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아웅산 수지를 처음으로 가택에 연금시켰다. 그녀는 군부의 폭력에 맞서 단식투쟁에 돌입했으며 국제사면위원회는 그녀를 양심수로 공식 인정하였다.
1990년 5월 27일 실시한 총선에서 가택 연금 상태의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전국민주연맹(NLD)이 82%의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군부는 권력 이양을 거부한 채 오히려 더욱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아웅산 수지는 1990년 10월 12일 부재상태에서 1990년도 래프토(Rafto)인권상을 수상하였으며, 1991년 7월 10일 역시 부재 상태에서 1990년도 유럽의회가 수여하는 사하로프(Sakharov)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991년 10월 14일 아웅산 수지는 비로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그녀의 민주화 운동과 인권과 평화를 위한 끈질긴 비폭력 투쟁에 대해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 많은 국제적 노력 끝에 1995년 7월 10일 아웅산 수지는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으며, 이후 군사정권과 민주화 세력 그리고 소수민족 집단간에 정치개혁을 위한 대화를 제의하는 활동을 펼쳐나갔다. 또한 그녀는 외국기업들의 투자는 미얀마 군부의 힘을 키워주는 것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외국기업들에게 민주화가 이룩되기 전에는 미얀마에 대한 투자를 하지 말아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군사정권은 아웅산 수지의 정치적 활동을 저지하며 양곤 밖에서의 활동에 대한 제지는 계속되었다. 2000년 9월 23일 아웅산 수지는 다시 가택 연금을 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웅산 수지는 NLD의 지도자들과 유럽 연합 대표, 유엔 인권 감시관, 유엔 특사 라잘리 이스마일 등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는 군사정권의 2000년부터 아웅산 수지에 대한 상당히 완화된 대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이유로는 아웅산 수지에 대한 국제사회의 개입이 강화되었던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02년 5월 6일 아웅산 수지는 19개월의 가택 연금 상태에서 다시 풀려난 후, 전국의 소수민족의 지역과 많은 지역을 순방하며 소수민족간의 통합과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다시 2003년 5월 30일 저녁8시 경에 아웅산 수지와 NLD 부의장인 우틴우를 비롯한 NLD의 지도부를 겨냥한 것으로 추정되는 암살시도가 발생하였다. 아웅산 수지는 그 지역에서 무사히 탈출했지만, NLD의 지도부와 멤버들, 그리고 여러 명의 동조자들이 사살되었다고 확인되었으며, 많은 국민들이 부상을 입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었다. 이는 대학살로까지 불리고 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아웅산 수지는 2003년 5월 30일부터 지금까지 3번째 가태 연금되어 있는 상태이다.
또한 최근 아웅산 수지와 대화를 지지하는 등 군무 정권 지도자 중 가장 개혁적인 인물인 킨 윤 총리가 해임되고, 후임으로 최고권력자 탄 쉐 의장이 이끄는 군부정권인 국가평화발전위원회(SPDC)의 제1서기 서 윈 중장이 임명된 일련의 사태는 아웅산 수지의 행보를 더욱 어둡게 한다. 서 윈 중장은 야당 지도자인 아웅산 수지 주도의 민주화 운동에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기 때문이다.
Ⅴ. 마치는 말
민주화에 관한 한 미얀마의 미래는 여전히 비관적 불확실성의 지배적이다. 미얀마는 외견상으로 일정 정도 사회주의 계획통제 경제체제로부터 자본주의 자유 시장경제체제로 진전되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나, 권위주의적 군부통치로부터 민주주의적 문민통치로의 이행은 아직도 불투명하고 요원한 상태에 있다. 1988년 미얀마 민주항쟁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도 미얀마 군부는 네 윈의 막후 조종을 통해서 군의 단합과 결속을 이끌어낼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물리력을 통해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tate Law & Order Restoration Council : SLORC)에 의한 통치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
지금의 미얀마는 경제발전과 국민통합,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세 가지 큰 과제를 놓고 \'제도로서의 군부\'(SLORC)와 아웅산 수지로 대표되는 문민 리더십이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군부 측은 민주주의보다는 경제발전과 국민통합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아웅산 수지 측은 민주주의를 통해서 경제발전과 국민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각 정치세력들은 여러 프로그램과 주장을 내어놓고 있지만 협상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으며 상호불신과 대립 가운데 결국 정치권력의 장악에 있어서는 무력이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저항뿐만 아니라 외국의 경제제재 및 세계시민들의 자발적인 압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후 1988년 9월 18일 친위 쿠데타로 다시 권력을 확보한 군부는 국가법질서 회복위원회(The State Law and Order Restoration Council: SLORC)라는 군사정권을 만들고 정권 수호를 전면에 내걸었다. 이에 아웅산 수지는 9월 24일 전국민주연맹(The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을 창설하고 사무총장에 취임하였다. 아웅산 수지는 독재자 네 윈에 대항하면서 비폭력 운동을 전개하고 전국을 돌며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평화적인 민주 개혁과 자유 총선 실시를 요구하였다.
4. 아웅산 수지 지지의 연유
신화적인 아웅산 장군의 딸이란 점에서 젊은이들의 주목을 끌 만했다. 또 하나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지적 엘리트라는 점도 어필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성이라는 점고, 어쨌든 가냘픈 몸매의 한 여성이 남성들도 감히 함부로 말하지 못하던 내용을 거침없이 내뱉는가 하면, 네 윈 정권에 강력한 비판을 해대자 그녀는 순식간에 반정부 그룹의 지도자로 부상하괴 된다. 여기에는 특히 기존의 정치인에 식상한 채 참신한 지도자들을 갈망하고 있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젊은층의 기호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5. 가택연금 후의 아웅산 수지
1989년 7월 20일 군부정권은 영장 없이 체포하고 3년간 재판 없이 구금할 수 있도록 하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아웅산 수지를 처음으로 가택에 연금시켰다. 그녀는 군부의 폭력에 맞서 단식투쟁에 돌입했으며 국제사면위원회는 그녀를 양심수로 공식 인정하였다.
1990년 5월 27일 실시한 총선에서 가택 연금 상태의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전국민주연맹(NLD)이 82%의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군부는 권력 이양을 거부한 채 오히려 더욱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아웅산 수지는 1990년 10월 12일 부재상태에서 1990년도 래프토(Rafto)인권상을 수상하였으며, 1991년 7월 10일 역시 부재 상태에서 1990년도 유럽의회가 수여하는 사하로프(Sakharov)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991년 10월 14일 아웅산 수지는 비로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그녀의 민주화 운동과 인권과 평화를 위한 끈질긴 비폭력 투쟁에 대해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 많은 국제적 노력 끝에 1995년 7월 10일 아웅산 수지는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으며, 이후 군사정권과 민주화 세력 그리고 소수민족 집단간에 정치개혁을 위한 대화를 제의하는 활동을 펼쳐나갔다. 또한 그녀는 외국기업들의 투자는 미얀마 군부의 힘을 키워주는 것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외국기업들에게 민주화가 이룩되기 전에는 미얀마에 대한 투자를 하지 말아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군사정권은 아웅산 수지의 정치적 활동을 저지하며 양곤 밖에서의 활동에 대한 제지는 계속되었다. 2000년 9월 23일 아웅산 수지는 다시 가택 연금을 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웅산 수지는 NLD의 지도자들과 유럽 연합 대표, 유엔 인권 감시관, 유엔 특사 라잘리 이스마일 등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는 군사정권의 2000년부터 아웅산 수지에 대한 상당히 완화된 대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이유로는 아웅산 수지에 대한 국제사회의 개입이 강화되었던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02년 5월 6일 아웅산 수지는 19개월의 가택 연금 상태에서 다시 풀려난 후, 전국의 소수민족의 지역과 많은 지역을 순방하며 소수민족간의 통합과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다시 2003년 5월 30일 저녁8시 경에 아웅산 수지와 NLD 부의장인 우틴우를 비롯한 NLD의 지도부를 겨냥한 것으로 추정되는 암살시도가 발생하였다. 아웅산 수지는 그 지역에서 무사히 탈출했지만, NLD의 지도부와 멤버들, 그리고 여러 명의 동조자들이 사살되었다고 확인되었으며, 많은 국민들이 부상을 입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었다. 이는 대학살로까지 불리고 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아웅산 수지는 2003년 5월 30일부터 지금까지 3번째 가태 연금되어 있는 상태이다.
또한 최근 아웅산 수지와 대화를 지지하는 등 군무 정권 지도자 중 가장 개혁적인 인물인 킨 윤 총리가 해임되고, 후임으로 최고권력자 탄 쉐 의장이 이끄는 군부정권인 국가평화발전위원회(SPDC)의 제1서기 서 윈 중장이 임명된 일련의 사태는 아웅산 수지의 행보를 더욱 어둡게 한다. 서 윈 중장은 야당 지도자인 아웅산 수지 주도의 민주화 운동에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기 때문이다.
Ⅴ. 마치는 말
민주화에 관한 한 미얀마의 미래는 여전히 비관적 불확실성의 지배적이다. 미얀마는 외견상으로 일정 정도 사회주의 계획통제 경제체제로부터 자본주의 자유 시장경제체제로 진전되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나, 권위주의적 군부통치로부터 민주주의적 문민통치로의 이행은 아직도 불투명하고 요원한 상태에 있다. 1988년 미얀마 민주항쟁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도 미얀마 군부는 네 윈의 막후 조종을 통해서 군의 단합과 결속을 이끌어낼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물리력을 통해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tate Law & Order Restoration Council : SLORC)에 의한 통치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
지금의 미얀마는 경제발전과 국민통합,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세 가지 큰 과제를 놓고 \'제도로서의 군부\'(SLORC)와 아웅산 수지로 대표되는 문민 리더십이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군부 측은 민주주의보다는 경제발전과 국민통합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아웅산 수지 측은 민주주의를 통해서 경제발전과 국민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각 정치세력들은 여러 프로그램과 주장을 내어놓고 있지만 협상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으며 상호불신과 대립 가운데 결국 정치권력의 장악에 있어서는 무력이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저항뿐만 아니라 외국의 경제제재 및 세계시민들의 자발적인 압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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