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 시대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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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남북조 시대에 대한 이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개괄

2.북조의 귀족사회와 호한체제

3.효문제의 漢化政策과 胡漢體制

4.북조의 황제권력과 호한체제

5.효문제시기 대민통치의 재편과 한화정책

본문내용

한발릉(破落汗拔陵)이 주장을 살해하고 봉기하자 반란은 북변 전체로 확대되었다. 육진이란 북위초 평성을 몽골고원의 고차(高車)족과 유연(柔然)족으로부터 방위하기 위해 두어졌는데, 처음에는 선비족의 명문 출신과 귀부한 한족 호족의 자제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이후 그들에 대한 대우가 열악해져 중앙에서 파견된 진장(鎭將)들에게 천시되고 구사되는 형편에 처해 있었다. 이 불만이 폭발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효문제시기의 여러 정책에 대한 반발적 성격도 있었다.
파락한발릉의 군대는 북위와 유연의 군에게 패배하여 그 부하들은 하북 각지에 분산되었지만, 유현진(柔玄鎭) 출신의 두락주(杜洛周)와 선우수례(鮮于修禮)가 병사를 수합했고, 수례가 죽은 후 갈영(葛榮)이 전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수도 낙양을 위협했다. 이때 갈영의 군대를 격파하고 등장한 인물이 산서(山西)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갈족( 族)의 추장 이주영(爾朱榮)이었다.
당시 북위의 조정에서는 영태후(靈太后)파와 숙종(肅宗)파간의 대립이 있었는데, 숙종파가 이주영에게 의지하려고 하자 영태후파는 숙종을 독살해 버렸다. 이주영은 이를 알고 병사를 거느리고 낙양에 진입하여 영태후를 체포해 황하에 던졌고 신하 2천여 명을 살해했다(528년). 이를 하음(河陰)의 변(變)이라 한다. 이후 북위 영내의 반란은 거의 이주영에 의해 마무리되었지만, 이 사건은 북위의 귀족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이주영이 세운 효장제(孝莊帝)를 끌어들여 이주영이 입조(入朝)한 틈을 타 그를 살해했다. 그러자 이주영의 뒤를 이은 이주조(爾朱兆)는 다시 병사를 거느리고 낙양에 들어와 효장제를 죽이고 절민제(節閔帝)를 옹립했다.
이주씨의 부하 중에는 북진의 병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반드시 이주씨에게 심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중 회삭진(懷朔鎭) 출신의 고관(高歡)은 하북의 한인 호족과 결합하여 이주씨를 멸망시키고 낙양에 들어가 효무제(孝武帝)를 세웠다. 그러나 효무제는 고환을 꺼려 장안에 있던 우문태(宇文泰)에게 도피하였다. 그러자 고환은 대신 효정제(孝靜帝)를 세우고 수도를 업으로 옮겼다(534년)
장안의 우문태는 원래 무천진(武川鎭) 출신으로 이주영의 일족인 이주천광(爾朱天光)을 따랐지만, 이주영이 죽고 이주천관이 복귀한 후 그 지역의 실권자가 되었다. 이후 효무제를 독살하고 문제(文帝)를 세웠다(535년). 이로써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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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0.21
  • 저작시기2005.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6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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