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의 종말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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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1. 문제 제기 및 연구의 목적
2. 연구의 방법과 범위

Ⅱ. 몰트만의 신학 방법론
1. 몰트만의 생애와 신학의 배경
2. 희망의 관한 명상 - 왜, 희망을 말하는가?

Ⅲ. 종말론의 정의와 논쟁
1. 종말론의 정의
제32장 사람의 사후 상태와 부활에 관하여
제33장 최후의 심판에 관하여
2. 종말론 논쟁
(1) 철저한 종말론
(2) 실현된 종말론
(3) 실존적 종말론
(4) 칼 바르트의 보편 구원론안에서 나타난 종말론
(5) 세대주의 종말론

Ⅳ. 몰트만의 종말론 이해
1.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와 종말론
(1) 의의 미래
(2) 생명의 미래
(3) 하나님 나라의 미래와 인간의 자유
2. 개인적 종말
(1) 죽음이란 무엇인가?
(2) 죽음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본문내용

것에 유비하여 신자들은 그들의 죽음을 이 모든 사멸할 피조물들이 변용되고 영광의 나라로 거듭 태어나는 과정의 한 부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육의 부활"은 이 허무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 변형되는 것을 뜻한다. "삶은 변화되지 폐기되지 않는다"(Vita mutatur, non tollitur).
(2) 죽음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인간이 죽으면, 어떤 상태로 있게 되는가 하는 것은 종말론의 중요 주제 가운데 하나이며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문제다. 또한 이것은 장례식이나 추도식 등에서 자주 질문되는 실제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성경과 기독교 신학은 죽음으로부터 부활에 이르는 중간 상태의 기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의 인간 상태에 관한 성경은 거의 거의 침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언급이 드물다. 그것은 육체의 부활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간의 미래와 관련해 부차적으로 취급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육체적 죽음 후에도 인간은 의식적, 인격적 존재로 존속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기독교 신학은 중간 상태(intermediate state)라는 전문적 용어를 사용하여 육체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정통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은 죽음 이후에도 의식 있는 개별적 존재로서 계속 존속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시, 영화롭게 변화된 육체가 영혼과 재결합되어 부활할 것을 믿고 있다. 따라서 전통 신학은 중간 상태의 개념을 근거로 영혼 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조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중간 상태에 관한 교리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문제가 많은 주제다. 20세기 들어 중간 상태의 교리를 둘러싸고 많은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다. 정통주의는 영혼의 불멸과 육체의 부활 모두를 견지했다. 반면, 자유주의는 전자는 견지했으나 후자는 거부했으며, 신정통주의는 영혼 불멸 사상보다도 육체 부활 사상을 선호했다.
개신교 신학은 중간적 장소의 개념을 부정하고 있으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연옥설을 통해 그것을 주장하고 있다. 개신교 정통 신학은 중간 상태의 영혼은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으나 제7일 재림 교회와 여호와의 증인은 영혼 수면설을 통해 그리고 소시니안주의자들은 영혼 멸절설을 통해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최근 일부 성서학자들은 순간적 부활설로 중간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정말 죽음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생명에 대한 사랑에서, 특히 우리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사랑에서 경험한다. 근대의 개인주의는 죽음을 개인의 일로 만들어버렸다. : 각자는 그 자신의 죽음을 죽는다. 그리고 근대의 실존주의 철학은 각자의 죽음에 이르는 존재를 사유의 중심에 세웠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의 죽음에서 죽음이 무엇인가를 경험한다. 내 생애의 마지막에 나는 죽어감을 경험할 수 있지만 내 자신의 죽음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다. 나는 이 땅에서 나의 죽음을 경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을 때, 그들의 임종을 동반하고 그들 곁에 있음으로써 단지 간접적으로 그리고 참여하면서 그들의 죽어감을 경험한다. 죽어감의 과정은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또 인격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경험한다. 그들은 죽어도 나는 존속하며, 그들의 상실을 슬퍼하고 계속 살기 때문이다. 그들의 현존 속에서 행복했던 사랑은 그들의 상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사랑은 경직되지 않으면서 이것을 견딜 수 있을까? 어떻게 나는 그들을 계속하여 사랑할 수 있으며 냉혹하게 되지 않을 수 있는가? 죽은 사람들에 대한 나의 관계는 변화되는가? 죽은 사람들과의 지속적인 교통이 있는가? 이런 질문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할 때 제기된다. 이런 질문은 하나님과 나 자신의 관계와 관련하여 단지 개인적으로 답변될 수 없다. 이런 질문은 하나님과 죽은 사람들과의 관련 속에서 사회적으로 답변될 수 있다. 죽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나는 그들과의 교통을 유지될 수 있는가를 알고 싶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이 부활할 때까지 몸 그리고 영혼과 함께 무덤에서 잠자는가? 그들은 죄에 대한 벌을 면제받고 하나님을 볼수 있을 때까지 연옥의 중간 상태에 있는가? 그들은 벌써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의 행복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가?
죽은 사람들의 이 총체적 부활은 언제 일어날 것인가? 1966년 네덜란드 교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죽음 후의 생명은 새로운 몸의 부활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부활의 몸은 땅속으로 들어간 분자나 원자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은 새로운 인간으로 깨어나며, 부활된다." 1973년 '새신앙지침서'는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 : "죽은 사람들의 개인적 부활은 죽음과 함께 그리고 죽음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죽음 안에서의 부활을 우리는 어떻게 표상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종말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 최후의 날은 단순히 달력에 있는 연대기적으로 마지막에 오는 날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주의 날이요, 모든 날들의 날이다. 이 날이 죽은 사람들의 부활의 날이라면, 이 날은 사람들이 시간적으로 언제 죽었든지 간에 동시적으로, 한 순간에 다시 말하여 통시적으로 모든 죽은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이것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또한 거꾸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즉 이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개별의 죽음의 시간들은 이 영원한 주의 날도 이끌어 들인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사람들의 연이어짐 속에 있는 땅위의 시간이 없다면, 모든 사람들은 어떤 시간에 그들이 죽었든지 간에 하나님을 똑같은 시간에,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시간속에서, 영원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 만난다.
총회는 1979년 지침서에서 죽음 안에 있는 부활의 표상을 거부했다. 그러나 칼 라너에 의하면 "몸과 영혼을 가진 인간의 단 하나의 그리고 전체적인 완성이 죽음과 함께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며 육의 부활과 보편적 심판은 세계의 시간적인 역사를 따라서 일어나며 양자는 각 사람들의 개별적인 심판의 총회와 일치한다 생각하는 것은 이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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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07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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